시작페이지로 시작페이지로
즐겨찾기추가 즐겨찾기추가
로그인 회원가입 | 아이디찾기 | 비밀번호찾기 | 장바구니 모바일모드
홈으로 와싸다닷컴 일반 상세보기

트위터로 보내기 미투데이로 보내기 요즘으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설날의 追憶
자유게시판 > 상세보기 | 2020-01-24 00:57:55
추천수 3
조회수   1,088

제목

설날의 追憶

글쓴이

이정석 [가입일자 : 2013-01-27]
내용
옛날 어렷을 적,

섣달 그믐날 잠이들면 "눈썹이 하얘지고 눈이 붙어서 앞을 못 본다"라고 하여

설날 전날 저녁에는 눈꺼풀을 손으로 찝어 올리면서 잠을 쫒던 생각이 나네요^^

은젠가 잠을 참고 또 참다가 그만 잠이들고 말았는데

누나와 형이 밀가루 갠 물을 눈썹과 눈에 발라놔서

봉사가 된줄 알고 울고불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습죠.



아마도 얀일곱살(여섯살~일곱살) 쯤 될랑가?

하여튼 제가 눈이 안떠진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니

어머니가 "야 이놈아 네가 하도 말을 안들어서 부처님이 벌을 준거여!"

그리고는 제 귀에 입을 대시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열번만 하면 눈이 떠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니타불....을 외쳤는데

"이눔아 크게 해야 부처님이 듣지 그렇게 하면 눈을 절대루 못떠!"

"동네가 떠나가도록 크게 크게 혀봐!"

"아! 심청이는 아버지 눈뜨게 하려고 목숨까지 바쳤는디

사흘에 죽 한그릇 못먹은놈 같이 하믄 부처님이 들어주기나 하겠냐?"

그래서 저는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나무아미타불!!!"을 외쳤는데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물론 눈물에 밀가루가 녹아서 눈이 떠진 것이지만

그 후 한참 뒤까지 부처님께 빌어서 눈이 떠진 걸로 알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제가 눈이 떠서 광명을 찾았을 때

어머니와 누나, 형들이 왜 그렇게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는지도

한참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답니다.

.....참, 그리운 추억이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입니다.

참고로 저희 어머니는 천주교 신자셨는데

왜 부처님을 찾으라고 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설날이 다가오면,

그래도 명절이라고 동네에서 되야지를 잡았는데

그때는 선지를 해먹으려고 돼지 목을 따서 잡았더랬습니다.

당시 돼지잡는 소리가 온 동네를 진동시켰는데

꽤~애~액! 꽤~애~액~!거리는 소리는

돼지를 묶을 때부터 목을 딸 때까지 계속되다가

숨이 떨어질 때야 멈췄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원시적이고 야만적이지만

그때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되야지 목을 따면 시뻘건 피가 콸콸 쏟아졌는데

어른들은 내장을 뒤집어 내용물을 씻어내고

소금으로 박박 문질러 점액과 구린내를 없앤 다음

목화실로 한쪽을 단단히 묶고 선지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선지가 쏟아지지 않게 반대쪽을 묶은 다음

솥에 푹 쪄내면 오리지널 "순대"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런 방식이 아닌 병천순대형 순대가 일반적인데

당시의 순대와는 도무지 맛도 없고

또한 오리지낼리티가 떨어져서 저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허긴 언젠가 전라북도 진안 5일장에 갔더니

바로 그 오리지널 순대국을 파는 집이 있어

정말 맛나게 먹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만, 지금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설날 때문에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달구새끼도 서너마리 잡고

동네마다 시루떡, 인절미떡을 하고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서 돌에 받치고

들기름 처~억~척 발라 전도 부치고 했었지요.

그리고 "김"도 구웠는데 옛날에는 "김"을 "해우"나 "해태"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에사 마트에 가서 구운 김을 사먹으면 그만이지만

그때는 소금친 들기름을 소나무 작은 가지로 찍어 발라서

잿불에 사~알~살 구으면 그 냄새가 참말로 환상이었습니다.

엄마 안보는 틈에 슬쩍슬쩍 뜯어먹다가

뒷통수가 번쩍! 할 정도로 군밤도 얻어맞기도 했었는데.....

그 어머니는 이미 진작 하늘나라로 가셨고

이제는 딸내미가 애를 데리고 명절 인사를 올 정도로

세월은 까마득하게 흘러가 버렸습니다.

세월은 유수 같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설날이 오기를 맨날 손꼽아 헤어가며 기다렸는데

그것도 그럴 것이,

설날이 되면 새옷도 한벌 얻어입을 수 있고

재수 좋으면 신발과 내복도 새것을 선물받을 뿐만 아니라

필히 설사를 유발하는 맛난 음식이 풍족하게 장만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동네 어른들이나 집안 어른들한테 세배를 가면

우선 넙죽 절하고 받는 세배돈이 짭짤하였고

예외없이 떡이나 전, 그리고 유과(한과인데 기름으로 튀겨서 유과하고 함)도 얻어먹으니

먹을 것이 없어 맨날 뱃가죽과 등가죽이 키스하던 시절에

그 얼마나 기다리고 고대하던 명절이었겠습니까?



그 전통은 아직도 여전히 살아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날 옛적에 느꼈던 "설"과는 체감하는 느낌이 사뭇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옛날에는 "약국집에 가면 세뱃돈을 오백원 준다"라고 소문이 나면

동네 아새끼들 죄다 몰려가서 세배줄을 서곤 했는데

"거시기 양반은 자린고비라 10원밖에 안준디야~"하면

그집은 되도록 패쓰하는 영악함도 있었답니다.

허긴 옛날에 누가 현금을 맨날 차고 살았겠습니까만,

그래도 귀하디 귀한 세뱃돈을 한푼이라도 더 챙기려면

인심이 후한 집에 먼저가서 돈 떨어지기 전에 선착순을 서야 했는데.....

이놈의 팔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돈福이 없어

맨날 남이 쓸고 간 자리에서 이삭이나 줍는 신세였답니다^^



왜냐하믄,

집안 어른들이 하도 많으셔서

우리 동네만 친할아부지, 할매를 비롯한 어른급만 수십명이고

이웃동네까지 아부지를 쫒아가서 세배를 드려야 했으니

해해마다 설날 당일은 커녕

그 이튿날까지도 맨날 처먹은 떡배, 고깃배가 그득해서

일부는 설사로 날리고

일부는 돌멩이도 소화하는 소화력으로 날려서 해소했는데

정작 귀하디 귀한 새뱃돈은 기껏해야 500원~1,000원 이었습니다.

허긴 그때 라면이 12원~15원 할 때니

500원, 1,000원도 적지는 않았지만서두

다른 아해들에 비해서는 수입이 보잘것 없었다는 것은 사실 중의 사실입니다.



뭐, 간혹 땡잡는 때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우리 옴마 막내 여동생, 그니까 제 이모님이죠^^

이 이모님은 당시 서울 중구 필동의 부잣집에 사셨는데

어릴 때 우리 옴마가 업어키운 정이 있어서(우리 어머니는 장녀)

간혹 명절에는 기차를 타고 예기치 못한 방문을 하였습니다.



그때는 정말 정말 온 집안이 경사를 맞듯 환영 일색이었지요.

우선 시골에서는 귀하기 귀한 "미깡"(귤의 일본어)도 있고

생전 듣도보도 못한 미국 비스켓에 초콜렛 등의 과자가 가방에 한가득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옷도 한벌씩 사오시고

세뱃돈도 그냥 2,000원~3,000원씩 왕창 하사하셨으니......

옴마는 보고싶은 막내동생 봐서 좋고

우리 형제들은 이쁜 이모를 봐서도 좋았지만

손이 무진장 큰 이모의 하해와도 같은 선물 공세가

그 무엇보다도 좋았더랬습니다.

글고, 그 당시에는 전화가 없어서 사전에 연락은 없었는데

굳이 예고편이 있다면 올지도 말지도 모르는 "편지"가

한, 두달 전에 왔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새벽열차를 내리는 이모 꿈을 꾸기도 하고

멀리서 낯선 여자가 기차에서 내리면 이모인지 아닌지 냅다 달려가서 확인도 했더랬습니다.

그 이쁜 이모님도 이제는 저 먼 세상으로 가시고 말았지만요.....!



하여간,

해마다 마지막 달력이 뜯겨나가고 나면

젊었을 때는 무심무심했었는데,

세월이 흘러흘러 늙고 쪼그라 드니,

이제는 마지막 달력이 새삼 처량해 보입니다.

......!



허긴,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제는 오래 살 일만 남았다"라고 생각하여

"東海 逢來島에 가면 불로장생초가 있다"라는 도인의 말을 듣고

심복인 徐福에게 "불로장생초를 찾아와라"라고 시켰더니

몇년만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봉래도에 사는 신선이 처녀 3,000명과 金子 3,000량을 가져오면 불로초를 주겠다"라고 합니다.

진시황은 즉시 3,000명의 처녀와 돈을 주어 불로초를 구해 오라고 시켰으나

서복이란 놈은 그길로 일본으로 뺑소니 쳐 버렸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서복이 진시황을 등친 것이지요.

서복이 생각할 때,

"불로초를 찾아도 죽고 못찾아도 죽을테니 도망가는 것이 최선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쨌던가 천하를 손에 넣은 진시황제도

결국 마흔살도 못살고 뒈지고 말았는데

16조원이나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이건희가

돈이 없어 저러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고

결국 "생자필멸"의 법칙속에 스러져 가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우주에서 가장 무섭고 힘이 센 놈은 오로지 "세월"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양력설은 설도 아닌 설이라

그냥 설설 지나갔고,

수천년 전부터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설"은

그야말로 명절 중의 명절인 음력 설이니

양력 설에 패쓰하였던 "떡국" 한그릇 의무적(?)으로 처먹어야 하고

그 떡국 한그릇에 우리는 또 한살 더 먹게 되었습니다.



설명절을 앞두고 괜히 옛날 생각이 나서 한글자 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들 받으시고 건강들 하십시요^^
추천스크랩소스보기 목록
손은효 2020-01-24 05:28:20
답글

저도 이 글을 읽으며 설날의 추억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연륜은 제가 짧은듯 해도 비슷한 기억들을 많이 공유하게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정석 2020-01-24 08:47:45

    허긴 그 세월이 그리 멀지도 않은 것도 같은데...
길다면 길구 멀다면 멀구....

그때는 없이 살아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는가 봅니다.
아마도 세상 걱정없는 아해라 그랬을지도....

은효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염일진 2020-01-24 07:38:24
답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건강하세요.

이정석 2020-01-24 08:54:31

   
감사합니다^^

장순영 2020-01-24 08:28:32
답글

어차피 공수래 공수거인데요 뭐...그래서 저는 미련 안 남게...암것도 없슴돠...ㅋㅋㅋㅋㅋㅋ

((로또나 빨리 돼야 허는디...))

이정석 2020-01-24 08:58:36

    ㅎㅎ
올해는 필히 로또가 당첨되시길^^
감사합니다.

김승수 2020-01-24 10:48:31
답글

설 전날 꼭두아침 일찍부터 시장통 떡간앞에 긴줄을 서서 김 모락나는 허연 가래떡을 받아 놓고는

온식구가 동네목욕탕에서 피부가 퉁퉁붓도록 때 밀고 , 새신발 한컬레와 새옷 한 벌 받았던 기억이^^;;

장순영 2020-01-25 09:35:01

    시장통 떡집에 다라이 놓고 줄섰던 기억 납니다...;;;

어릴적 오마니가 시장가서 낙하산 기름 한 병 사와라 하시면

왜 이건 이름이 낙하산일까? 고민했었죠...ㅋㅋㅋ

그땐 저두 꽤나 귀여웠군요...;;;;

이정석 2020-01-24 12:01:14
답글

ㅎㅎ...
저희는 방앗간을 가지 않고 시루에 찹쌀을 쪄서
떡메로 친 다음 인절미를 만들고
시루떡은 별도로 했는데 그것도 맷떡과 찰떡을 따로 했지요.
뜨끈뜨끈한 찹쌀 인절미 맛이란....
요즘 떡집 인절미는 쉽게 굳지는 않으나
그때보다 맛은 어림 없는 것 같습니다.

목욕은 저희 동네에 일본인 관사가 7~8동 있었는데
따로 목욕실이 있었습니다.
목욕통은 길다란 밥솥같이 생긴 철통에
장작불을 지펴 물을 데운다음 때를 불리고 닦아냈습니다.

김재만 2020-01-24 12:44:19

    어렸을 때 기억 중 많은 부분이 닮았네요. 덕분에 잠시 아련해졌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이정석 2020-01-24 15:00:59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저의 또래는 거의 그렇지 않았을까요?

  • 광고문의 결제관련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