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漁樂강변에서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22-11-04 08:52:28
추천수 2
조회수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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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정래 [가입일자 : 2016-01-15]

제목

漁樂강변에서
내용

2틀을 묵었다







보백당 어르신의 손자가 이 강변에서 희돌아 흐르는 강물 속에서 느긋하게 꼬리를 흔들면서 자기 生을 즐기는
잉어 漁群을 보고 어락정을 지었다는 漁樂 강변이다.

손자는 날이 더우나 추워도 단 한번도 집에와서 잠자지 아니하고 부모산소를 3년을 꼬박 시묘살이한 孝子다.

1960년대만 해도 산에 있는 부모 천년 흙집 옆에 작은 초막을 짓고 시묘 살이 하는 이들을 볼 수 있었던 나라인데..이젠 볼 수 없는 우리 문화가 되었다.

서양 문물이 들어 오면서 우리 것을 많이 읽어버린 나라인데..반대로 광란의 핼러윈 같은 축제가 자리 잡은 문화도 있다.

인간의 삶은 세월을 따라 변한다.

물론 세월의 흐름을 타고 사라지는 것을 지키려는 나라도 있는데..아랍의 희잡 문화 같은 것은..강제로 지키려다보니 결국 저항 세력도 생기고 죽음도 발생하는 것을 보면 ...딱히 어느것이 옳고 그르다 할 기준점이 모호해지는 세월이고 때로는 위정자들의 권력 유지나 종교적인 타산적  굴레도 쒸우기도하고 , 비판의 대상으로 몰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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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휘돌이 강변에는 일평생 살아도 남에게 싫은 소리 한번 아니하고 살아 될 그런 곳이다.

원래 어락 강변에는 소백산 줄기가 토해 낸 은모래들이 가득했었는데 ...

상부측에서 안동 땜 임하땜이 들어서고

해마다 껵던 여름철 큰 물 홍수도 사라지니 자연히 개골 석벽아래 깊은 消도 사라지고 은모래도 줄어들고 축산업 발달로 토양에 질소가 많아지니

이젠 강바닥은 갈대와 오만 잡초가 무성한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맞는 장소이지만

옛날과 달리 은모래 자리에 오만 잡초가 자리 잡았지만 그도 나름 자연의 숨결인즉 싶다.









어릴적 이 강변에 봄소풍을 갔었는데...도시락 보리 밥도 없어서 못 간 아이들이 한반에 열명도 넘었다.
원래 풍광 좋은 곳은 먹거리가 적어 궁핍하지만 ..반대로 나라에 큰 인재들이 많이 나기도 한다.
이 가난한 땅에서 학문을 이르킨신 분들이 모여서 천리 만길 떨어진 한양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리면 ...임금이 나라 정책에 필이 참고를 했다한다.

그래선지 오랑캐들에게 안전한 이지방에 훈민정음 귀중한 책을 숨긴도록 한 곳이기도 하다.
1조원의 가치가 있다는 그 귀중한 훈민정음 서책을 언론이 상주본이라 지칭하지만 사실 정확히 말한다면 훈민정음 안동본인데 학가산 너리티 고개 아래 절에 인간들이 몰래 들어가 법당 부처님 배를 가르고 훔져 간 것이다.

그렇게 도둑질로 세상에 나 온 책을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세월이다.

남 탓만 할 줄 알고 내 탓을 모르는 그런 인간들이 이글을 보면 또 막단어 몇개로 해작질 심보가 발동 할 일이지만 어락 강변 효자 이야기와 훈민정음 자료로 남긴다.


2틀을 어락정 아래 강변에서 차박 노숙을 했지만
이 강변에 전에 살았던
漁舟者는 ...이제는 보이질 아니했다.

봄 소풍 날 도시락이 없어서 못가던 기철이를 내가 갖고 갈 감자 다섯개를 나누어 먹 기로 하고 함께 이 강변에 소풍을 왔던 일이 어제 같은데...기철이는 이미 밥 숟가락 놓고 뒤산으로 갔고..헤엄 잘치던 만수도 명퇴 후 고향에 내려와 농사 짓더니 ..풍으로 쓸어져서 고생하더니 고인이 되었다.

강물은 흘러 남으로 가고
씨동무도 하나 둘 이 강변을 따났는데..나라고 별수 있겠나! ..언젠가 나도 곧 어제처럼 떠나겠지만

그래도 해마다 강변 저 건너편에는 퇴계선생이 아끼셨던 桃花꽃은 변함없이 피고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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