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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명 아가씨 속에서..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22-04-26 14:14:28
추천수 3
조회수   5,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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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정래 [가입일자 : 2016-01-15]

제목

2천명 아가씨 속에서..
내용
 

이 아래 제 국산 명기글에 뎃글 주신 이정석님에게 감사드림니다.

오늘에서야  이선생님 뎃글 읽어 보고 한참 지난 뎃글이라서 오늘  별도로 답글을 드림니다.


한마디로 

제가 오디오 쪽 분들을 만난지 무려 20년 가깝습니다만
드디어 튜너 소리 잘 구분 하시는 분을  뎃글로 처음 만난 것 같아 기뻤습니다.

제 오디오룸에는 독일제,미제 일제 튜너들이 있습니다만   보통 오디오 맨 방문시 

93.1 청음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는 골목 쓰레 통에서 주운 중국산 레시버이구요
             (레시버인데 검파단 이후는 짤라버리고 튜너로 사용합니다)

다른 하나는 
국산 소노라마 중고 튜너인데..소리전자에서 5만원에 구입 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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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으로 1970년대 이땅의 전자공장에서 일했던 우리들의 아가씨들 이야기 글을  추가 했습니다.













1972년은 대한민국은  필리핀보다 못 살던 가난한 나라여서 먹는 것 조차 부실했던 나라입니다
허긴 100% 쌀밥을 먹고 싶어서 월남전에 지원하는  청년도 있었고, 
자원 빈국이라서 초등학교 다니는 딸들의 머리를 길러서 머리가 자라면 짤라서 팔았던 참으로 궁핍한 나라였습니다.
한국 어린 소녀들의 윤기 나는 머리카락으로 만든 가발이나 음밀한 부분의 가짜 제품은 미국서 사는 흑인 여성들에게는 필수 고가품으로 둔 값했었지요.

부평공단에 대형 가발공장이 들어서고,
구로 공단, 마산 자유수출 지역이 들어서고, 미주지역 민수용 전자 제폼 판매가 폭팔하고 제조라인이 필요하자 일본 전자 산업 공장들이 한국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oem으로 제조를 한국서 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최초의 소형 am/fm 라디오 제조는  부평 공단에서 시작 되었습니다.

전국 산산  골골이서 자란 우리들의 딸들이 공장으로 몰렸지만 중노동인지라 작업 중 쓸어지는 영양 부족 국가여서 그 때 부터  오후 작업 중에 간식으로 빵과 우유를 주자 그걸 먹지 아니하고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들을 위하여 갖고가는 아가씨들이 제법 있었던 나라입니다.

난방시설은 연탄이였구요.
주거환경은 ..공장 주변 삭을 세 방을 많이 만들어서 공장 여공들에게 공급이 되고
일부 회사는 기숙사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남녀  청춘이 모인 공장이라서 ...그
중에서도 몰래 사랑이 이루어지고.....
야간 작업 하는 날은 보일러 실에서 연애를 하다가 들킨 짝도 있고,
컴컴한 제품 창고에서 입을 맞추다가 들킨 짝도 나오고...
ift 조정  실드룸 안에서 연애 사건도 터지고..

공장 주변  추운 날 연탄 불이 꺼지면
남자 동료나 직장 상사 따뜻한 방에 와서  아가씨들이 자고 가는 일도 있었는데..

근무 동료 중에 유독 연탄불이 자주 꺼지던 아가씨를 재워 주다가 결국 아이를 배어서 결혼한 짝도 있었을 정도로 ...연탄 불 핑게? 사랑도 실제로 있었던 나라입니다.

공장 주변 벌집  작은 방을 구해서 2-3명이 자취를 하고
초봉이 1만원을 전후라서  가능한 잔업을 서로 하려고 했던 시절입니다.
보너스나 월급은 명세서와 함께 현금 봉투를 주었는데 돈 봉투  받는 날은 제조 라인 여기저기 돈세는 기쁨도 있고  반대로 잔업이 적어서 월급이 예상 외로 작은 아가씨들은 눈물을 흘리고.....

20세가 되도록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 해본 적이 없는 시골 아가씨들이 많아서 입사 다음날부터 수세식 화장실 사용법을 교육 프로그램에 넣었고, 영양 부실로 작업 중 쓸어지거나 졸도하는 아가씨들도 발생하여 별도의 창고 공간을 마련하여 쓸어진 아가씨들을 쉬도록 하고..

아가씨들 목표로 양장점이라는 것이 생기고 ...
윤복희가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귀국하면서 초미니를 입고 나타나서 그 이후에 급속히 초미니 스커트가 유행하여....그런 초미나 아가씨들이 지나가면  한창 젊은 청년들은 솟는 정열을 감다하지 못하여 휘바람을 획 획  불기도 하고
요즈음처럼 보리가 한창 자라는 계절에는 공단 주변 보리밭이 망가지는 일도 생기던 시절입니다.

오지서 서울 올라 온 아가시들은 실제로 브라쟈 착용 전에는  젓 가리개를 사용하던 시절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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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지역에 야구 같은 스포츠 중계가 인기 문화로 자리 잡고, 어린아이들이 워키토키를 갖고 놀고 사무실에 인터컴이 사용되고  텔레폰, 자동 엔설링 같은 소비 패턴 붐이 일면서 미주 지역에 폭팔적으로 일본 전자 제품들이 팔리자
미국서 가장 큰 Radio shack 판매망이 값싼 량질의  노동력이 풍부한 한국 마산 자유수출 지역에   제조 공장을 설립하고

함안,군북,진주,창영,부산,밀량 등지에서 고졸 농촌 아가씨들을 모집하여 일주일 정도 납땜 교육을 한 이후에 제조 라인에 투입되었고 국내 최초로 

"인간 노동 착취기"

인 콤베아 벨트가 무려 100m 넘는 것들이 일본서 수입되어 제조라인에 투입하고
무려 2천명이 넘는 아가씨들이 연일 잔업을 하여도 수출 납기를 맞출 수 없을 정도로 각 제조라인에서는 전자제품들이 산더미처럼 량산되고, 

일본인들의 수출 바이어 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으면 , 이미 포장했던 제품들을 전수 재작업하고 그러는 날은 자연 빨간 스카프를 쓴 작업 반장들 목소리가 커지고 제조라인 여기저기 밀린 작업에 땀흘리면서 일하던 이땅의 딸들은 혹여 힘들어도 눈물만 그렁그렁 훔치고 항의를 하거나 ,회사를 그만들 생각조차 못했던 참으로 힘든 노동 환경이였습니다.

한때 김해 들판에 10마지기 쌀 농사 짓는 아버지보다 딸 하나 외국 전자회사에 취직 시키면 그 수입이 더 좋았던 시절이니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하여 참고 참아가면서 공장에서 일했던 대한민국의 신업 전사들..

세계 10대 경제강국은 이런 위국헌신한 우리들의 딸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일했던 제조라인도 약 2천명 정도  일했는데..콤베아 벨트는 절대 멈추는 일이 없이 제품 취부 작업이 내려오는데..혹여  작업 공정이 잘못 짜여진 자리는 작업이  밀려서 쌓이고...그런  상항이되어도 불평 한마디 못하고 혼자 눈물 뚝 뚝 흘리던 이땅의 산업 전사들 모습....

그렇게 매일 산더미처럼 전자 제품을 제조하고 매일 부산항을 거쳐서 북미주,호주,유럽으로 수출 켄 테이너가 출발했었구요.

국내 삼성,금성,대우, 잉켈 다 합쳐도 ..제가 다니던 외국회사 총 수출 금액을 넘지 못하던 시절인데  그런 힘든 제조라인에서 묵묵히 일하던 분들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 합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서로 사랑하고 하여 사내 커풀들이 태어나기도 하고 ..직장 상사와 불륜 사건도 일어나기도 하고, 저에게도 주말마다 작업복을 빨아 주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일종의 프로포즈 였는데...안동 출신이라서 손목 한번 잡아 보지 못했습니다.


돈되는 자원이 없었고 해마다 봅이되면 춘공기를 껵어서 봄소풍 도시락 쌀 형편이 안되어서 봄소풍도 못 가본 아이들이 존재했던 이땅에서 제되로 먹지도 못하고  주야로 제조 공장 현장에서 일종의 노동 착취 수준 조건에서도 열심이  일해서 이 나라의 산업 혁명 경제개발 초석을 이루신 그 때 아가씨들은 이제 어느 덧 할머니 대열에 들어  선 세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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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대한민국은 미주지역으로 스피커 수출을 가장 많이 했던 나라입니다.

대형 스피커는 주로 미국 내에서 제조했는데..옵티무스 스피커 제조 회사는 미국 택샤스 포트워스 북쪽 올드 다운타운 에 있었습니다.

서부시대 가장 큰 소 도매 시장이 사라지고 그 소 도매 시장을 스피커 제조 공장으로 바꾸어서 제조를 했었는데 
제조라인 작업자들은  무거운 스피커를 옮겨야 하니 거반  덩치 큰 흑인 여성이거나 멕시코 계 여성들이 였습니다.

부평공단-마산 자유수출 지역을 거쳐서 다시 미국  공장에 일 할 때 한국 아주머니들도 있었지만 힘이 약하니  한국 아주머니들은 주로 검사원으로 근무 했었구요  
체구는 작어도 한국 여성들이 인기였던 것은 작업 라인에서 만약 공구 하나를 바닥으로 떨어 뜨려도 한국  여인들은 허리를 굽혀서 바로 집어 올리지만 덩치 큰 흑인이나 멕시칸 여성들은 허리를 굽히지 못해서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떨어진 공구를 짚어 올리는데 꽤 나 시간이 걸려서 노동 질은 한국 여성들이 단연코 앞 질렀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우스 겔롤라이나 공장에서 근무 하다가 제가 귀국 하는 날은 공항에 무려 20명이 넘는 한국 아주머니들이 한국 총각과 이별 인사 하려고  나왔을 정도로 1970년  말 미국 이민사도 고국이 그리워 누가 귀국 한다하면 공항까지 나오든 문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배운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운 좋게 제조 라인에서 여러 노동자들과 한국 서도 해보고 미국 서도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그 당시 우리나라 근로조건은 ...한달 열심이 일해서 방세 내고 나면 먹는 문제도 풍족 하지 못했던 세월이여서
쉽게 이야기 한다면 거의 노동 착취 수준이였던 나라였습니다.








.....이땅의 산업일꾼 이야기 중에서 일부 발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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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철 2022-05-12 01:33:06
답글

제가 40대인데요 .
아마 저희 부모님이나 막내 삼촌 이모들 이야기 같네요. 장가 가기는 쉬웠을 듯 합니다. 연탄만 많이 사놓으면 되니까.
'그때를 아십니까' 같은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40년대생이신 아버지는 거의 매일 밥상머리에서 제가 밥풀이라도 하나 남기면 당신이 초년에 춘궁기에 굶던 이야기를 하시면서 긁어 먹게 하시던게 기억납니다.
제 아들은 중학교 3학년인데, 오락실이 뭔지 모릅니다. 손안에 오락실이 있기 때문이죠.
아스라한 옛날 영화같은, 상상할 수 있을듯 없을 듯, 그 느낌이 이 이야기와 저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요즘 반항기가 짙어진 아들이 저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이런 생경한 느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19세기의 느낌을 가진 20세기 후반의 이야기를 21세기에 듣네요. 아마도 이 말이 맞을 듯 합니다. 지난 50년은 19세기와 20세기 21세기가 공존하면서 꽤나 큰 충격과 이질감과 격차를 낳게 만들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정래 2022-05-12 15:16:00
답글

오랜만에 뎃글 다운 뎃글을 받아서 감사드림니다.

최선생님 뎃글을 제가 다른 수필 글 올리는 곳에 일부 인용하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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