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쪼데기.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21-03-09 10:11:56
추천수 3
조회수   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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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조정래 [가입일자 : 2016-01-15]

제목

쪼데기.
내용





사진:
1960년대 말자네 참외 밭에 봉구녀석하고 몰래 기어들어가서 참외 서리하던 방앗골 밭이다.
경북 도청이 이전하는 바람에 이제 이 밭도 내 사진으로 만 남아 있고 풍광은 사라졌다.

사진 속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오가 무 보물이요 보물 유청백이라 "

즉 나의 집에는 보물은 없고 청백이 보물이다....그 유명한 글을 남기신 조선 문과 급제하신 보백당 어르신의 고향이다.

나는 
그분이 말년에 낙향해서 학문 살이 할 때 지은 만휴정이나 묵계서원은 공작 포란형이 명 터이고......
도산서원,병산서원과 함께 많은 선비 학문가를 기르고 하여 조선의 시조문학 산지로 본다.

청백리 쌍벽을 이루신 한팔현오규의 허백당 어르신 고향이 바로 필자의 동네와 산 하나 사이고
복숭아 꽃이 핀 사진에서 매우 가깝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독립투사가 가장 많이 배출 된 곳이 우리 고향이다.
한 마을에서 독립투사를 무려 68명나 배출한 곳이지만 쏘련 유학 파를 중심으로 활동한 좌익계열이라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필자의 외척 집안이기도 하다



제목: 쪼데기.

글쓴이:
누군가 16년 전에 제가 쓴 " 춘자 보리밭에서 울다" 라는 수필을 동기회 단톡방에 올려서 많은 분들이 조오타 하니 ...70 동기회 단톡방을 위하여 시벽에 일어나  적어 올림니다: 조정래



소쩍골은 조선 중엽 상주서 선비 한 분이 들어와서 터를 잡고 살게된 이후에 마을이 형성 된 동네였다.

총 17가구가 살았지만 집집마다 아이들이 7-8명 되다보니 마을 골목에는 항상 아이들로 복작 거렸다.

아이들이 한창 자라는 나이에 먹는 것이 부실하니

"자식 농사 반타작이라고!"

동네 뒷산에는 아이들 무던 애촉이 여기 저기 있었고 어느 날 같인 놀던 동무가 덜컥 죽어서 지게에 휜 천 덮어쓰고 뒷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너도 나도 죽지 안으려고 눈만 뜨면 산이나,개울가에나,밭뚜버리 언저리를 돌아다니면서 입에 넣을 것 들을 찿아 다녔는데...

댁바리에 머름버짐 퍼진 택구,
구멍 난 란닝구 입고 다니는 기철이,
검정 고무신도 없어서 맨날 천날 맨발로 다니던 봉구 녀석하고 씨동무하며서 돌아 다녔다.

요즈음 아이들은 먹거리를 편의점이나 식품점에서 찿지만.

우리 씨동무들은 그런 것은 본적도 없고 그저 날새고 시간나면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구담댁 할매 밭에 오디 따먹기
시우실 할배내 보리 밭에 깜부기 따먹기
물박달 골에 올라 잔대 캐먹고,봄이면 미퍼리 여기저기 돋아나는 빼기를 캐서 먹고.
앞개울에 송사리,
겨울 논 웅덩이에 미꾸라지,
칠구네 밭뚜버리 있던 산딸기,
정살미 산에 돼지감자,
땅골 우물가에 개복숭아 열매,
미내미 골 상여 집뒤에 돌배나무,
그 나무 옆에 피던 새박이,
참솔고에 달리던 송구,
말자네 밍밭에 달달한 밍과 배차뿌래이,
보리밭 높이 떠서 우는 종달새 보고 있다가 ..그 종달새 집 알털기,
고추밭에 백깨구리 잡아 먹기,
하교길에 만나는 가치독사 잡아서 불에 꾸어 먹기,
새봄에 돋아나는 까시 덩굴 속 새순 꺽어먹기
초봄이면 온통 산을 붉에 물들이던 참꽃 순 따먹기
아카시아 꽃 따서 소금 뿌려 깡통에 넣어 삶아 먹기
알미봉 아래 꿩알 줍기.
초봄 무논 소똥 거름 섶에 모이는 우렁이 줍기,
올무 캐먹기,
천방 뚝에 돋아나는 삐삐 뽑아 먹기,
떨어지는 땡감 주워서 소금물에 담가 먹기,
말자네 참외 밭에 서리하기,
한씨네 개살구 따먹기.
양철영감네 콩서리 하다가 미쳐 다 주워 먹지도 못하고..저만치 지게 작댕이 들고 고함치며 달려오는 양철영감보고 혼비 백산하여 도망가기.
갱변 모로톱에 보리새우 잡아먹기.
서미골 개울에 타리 골뱅이 줍고, 가재 잡아서 꾸버 먹기.
홍수 지고나면 개울에 싸리 발로 붕어 잡어 먹기
하교 길에 순자네 밭에  무우 뽑아 먹기

양철 영감 밭뚜버리에 있는 고염낭구에  혹여 옆 동네 아이들이 먼저와서 따 먹을 세라 익지도 아니한 고염을 처먹고는 속이 다려서 밭뚜버리에 나래비로 앉아서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불알에 요롱소리 나도록 입주디에 넣을 것들을 찿아서  날마다 싸돌았고 동무 동무 씨동무 들은 
정도 많이 들었다.

그 들 중 내 친구 봉구 녀석은 말을 못한다.

당연히 말을 못하니 듣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논두렁 밭두렁 ,개울가 ,뒷 산골을 타고 다닐 때는 봉구 녀석이 가장 먼저 뱀도 발견하고, 한밤 중 서리 할 때는 봉구가 가장 먼저 어둠속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느낌으로 알았다.
그래서 한밤 중 서리 갈 때는 비록 말을 못하지만 봉구을 제일 앞 잡세워야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그런 봉구녀석은

심성이 너무 착하고 키가 작아서 누가 때려도 ...희죽 희죽 웃으면서 뒷 걸음질로 도망 다니기 일수였는데
그래서 다들 봉구를 모지래기 의미로

"쪼데기!"

라고 호칭을 했다.



어느 날 쪼데기 하고 나에게 큰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은 아침 나절부터 따뜻한 봄날이였다.

춘궁기라서 봉구네도 점심을 굶고
우리도 점심을 굶을 때인데...봉구가 감자 두개를 들고와서는

"우워..워..우우 "

하며 손지 발 짓으로 말하는데

봉구 손발 짓 말인 즉 감자 하나씩 나누어 먹고 읍내 장터에가면 옥수수를 뛰기는 뻥티기 아저씨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뻥!"

하고 터질 때 여기 저기 땅에 떨어지는 옥수수를 주워 먹을 수 있으니  가자고..말 .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겨우 오진 살로 5섯살 오진 살로 6살 든 나는 읍내 장터에 옥수수를 넣고 한참 불을 피워서 돌리다가 뻥!..하면 옥수수 알이 갑자기 네닷섯배나 커지는 뻥튀기 기계 옆에 떨어진 낱알 곡식 주워 먹으로

돌고개 넘고, 밤실 지나고,어란 색시 주막집을 지나서 읍내 장터에 들어 갔다.

소전 옆에 곡물 장수들이 모인 곳에서 뻥튀기 장수를 보았고 나름 자리를 잡고 기다렸지만...뻥뻥 소리 만 났지 정작 주워 먹을 뻥 낱알은 하나도 없었다.
왜야하면 뻥튀기 아저씨가 아가리가 큰 미군 마다리 푸대 큰 것을 덮어 쒸워서 밖으로 떨어지는 낱알은 없고 됫박으로 쓸어 담을 때 우쩌다 땅에 떨어지면 그도 먼 저 온 읍내 아이들이 번개같이 주워서 입으로 들어 갔다.

그때다.

어이 어이..소리 밖에 못하는
봉구를 읍내 장터 아이들이 보고는

"야들아 일마는 말못하는 버버릿다!"

누군가 소리치자 아이들이 갑자기 나와 봉구를 빙 둘러 서서는
얄마 절마(이놈 저놈) 하면서

"버버리 새끼"

"버버리 새끼"

놀리고 봉구와 나는 그런 읍내 아니들에게 겁먹은 얼굴로 실실 뒷 걸음 치는데..그,때 어느 아이가

"벙어리 새끼가 우는 소리 한번 들어보자 ...버버리 우는 소리는 참 요상하다 카더라!"


하니 아이들이 봉구녀석 댁바리를 툭툭 치고 봉구는 울상이 되더니 그만 어이 어이 하고 울음보를 터트렸다.

그러자 읍내 아이들이 내 친구 봉구 벙어리 울음 소리를 듣고는 깔깔 거렸고

나는 겁도 나고 하여 봉구 손을 잡고 집에 가자고 도망 치려는데 하는데 또 다른 아이가 봉구 멱살을 잡고는
넘어 뜨리고

"버버리 새끼야  한번 더 울어 봐라! 울어봐라!"

하더니 드디어 봉구를 올라타고 짓 이겼다.

순간 내 눈에 불이 났다.

마을에서 싸움 쫌 한다는 상두 형이..평소 우리들 세워 놓코는

"읍내가서 장터 아이들이 떼거리로 덤비거던 어차피 얻어 터지게 되니 맞을 봐에는 그중에 한놈을 골라서
돌맹이로 덱빠리를  캭 찍어 뿌래라!"

그 생각을 떠 올리면서 순간 울컥 하여 장마당에 있던 돌맹이 하나를 들어 봉구 녀석 올라 탄 넘의 뒷통수를 내리 찍었다.

그러자 바로 그녀석 머리가 깨지고 ...아이는 죽는다고 괙 소리를 지르면서 넘어졌고  바로 피가 흘러  밑테 깔린 봉구 란닝구에 떨어 졌다.
그러자 ..장꾼들이 우르르 모여들고,  돌맹이 든 나를 보고  읍내 장터 아이들은 놀라서 도망가고...
나는 봉구 손을 잡고 죽을동 살동 장 터를 빠져 나와서 어란골을 지나 단숨에 돌고개를 숨차도록 헉헉 도망쳤다.


...................중략......................


옥수수 티밥 알갱이는 한알도 못 주워 먹고 허기진채 소쩍새가 여기 저기 우는 그 먼 산길을 따라서 산골 집으로 돌아오면서 ..붕구가 중간 중간 어어..어버어버 거리면서 울었고 특히 그 귀한 라닝구에 코피가 묻어서 더 큰 걱정이였다.

아버지 일찍 죽고 엄마는 도시로 도망가고 가난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봉구는 지난해 겨울에 봉구 할배가 장작나무를 읍내에 팔아서 사준 옷이 망가져서 봉구는 한 걱정을 했고 나도 괜히 미안해서 따라서 찔끔 찔끔 거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마당에 멍석 깔고 이제 막 머얼건  안동 칼국시를 먹으려고 하는데 ...왠 할머니가 아이를 앞 세우고 마당으로 들었섰고 ...곧이어 우리 할머니와 그 할머니가 언쟁이 벌어지고 나서 상황 파악이 되었는데..같이 온 아이의 머리에는 뻐얼건 아까징끼 약이 처발라져 있고  그뿐 아니고  왼쪽 눈두덩이가 벌에 쏘인 것처럼 툭 뛰어 나 올 정도로 부어 있었다.


알고보니 내가 그녀석 올라 타고 돌맹이로 머리만 내려 친 것이 아니고 눈두덩이도 한번 더 내려 친 모양인데
그것이 점점 부어 올라서 결국 그녀석 할머니가 손자를 데리고 우리 집에 약 값을 받으로 왔던 것이다.

결국 그날 우리 할매는 김치 잠그려고 두었던 희제난 고추 열근을 고방에서 꺼내어 치료비로 주었고 ....
희제난 고추 10근 ..,,,없는 살림에 큰 손해를 낸 죄로 한동안 가슴앓이를 혼자 했었다.

집단으로 한 사람을 괴롭히는 근성들이 있어서 의외로 우리나라는 의외로 착한 사람이 어느 날 둔기 살인을 이르키는 것을 본 적도 있고 그 후에 사형자들을 계도하셨던 스님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살인자가 의외로 착하고 순한 면이 있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고...

내가 사실 그런 일을 어릴적 껵어서 그런지 가끔 뉴스에 이웃 둔기 사건이 터지면 ..범죄자보다 맞아 죽은 자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동물이나 인간은 먹거리가 부족하면 싸움이 일어 난다.
요즈음 유투브를 통해서 이북 꽃재비 실상을 자주 보지만 남한도 한 때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에...

천방 뚝 하나 사이로 돌배 나무에 달린 돌배를 이웃 동네 아이들이 따가면 생존 법칙에서 마을 아이들이 떼거리로 나와서 돌멩이를 서로 던지면서 먹거리 경계 존을 지키려고 했던 역사가 있었던 나라다.





---------------------------------인생 중략-------------------------------



새월이 훌러 외국에 갔다가 돌아와서 제일먼저 읍내 술집에 내려갔다.

거기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면서 그때 나한테 돌맹이로 대가리 터졌던 그 친구 안부를 물었다.

그 친구는 커서도 읍내 극장 됫 골목에서 산골에서 장보러 나오는 산골 청년들에게 술을 빼앗아 마시는 소위 읍내 강패였다.

그 친구 안부를 묻자..선배들에게 술잔을 돌리던 중학교 후배가 ...

"형님한테 머리 깨졌던 그 형님은 이미 고인 된지 10년 도 넘었니더..."

그래서 나는 가슴에 남았던 마지막 화해도 못하고 말았다.

이제 세월이 흘러 나도 노인이 되었고 어릴적 씨동무 봉구 녀석도 노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고향에가면 저만치 내친구 봉구는 밭에서 엎드려 일하다가 내 차를 보면

호미를 냅다 던지고

"어어 어어봐 어버봐:"


요란스런 소리를 지르면서 밭에서 뛰어나와서 내 손을 잡고 좋아라 반긴다.

그는 말못하는 장애를 갖은 친구지만 모지랩이 나를 무려 60년을 쪼데기처럼 반긴다.

영국서는 30년 지기 친구는 1억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들 하는데..굳이 돈으로 따지자면 봉구는 내 인생에 2억 짜리 친구다.

비록 같이 늙어가지만 고향 갈 때 마다 나를 반겨주는 봉구녀석이 있어서 행복한 노인이다.



....................어주자 인생일기 중에서 일부 발쵀.......................




꽁다리 글

그당시는 어느 마을이고 싸움이 붙으면 돌맹을 무기로 삼았다
안동 씨족사회 명문대가인 안동 김씨 집성 촌 뒤에는 정산뫼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 오르면
투석전을 치루기 위하여 돌 무더기가 여기 저기 실제로 있다.

언젠가 지방 신문에 글을 낼 때 우리 민족의 적석 문화에 밝은 00 대학 모 교수분과 함께 그 산 정상 부근에 형성 된인위적인 돌 탑을 둘러 보았는데..그것이 석기문화 시대에 쌓은 것이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 적석 앞에 읍내서 설명서를 나에게 부탁하여 지금도 그곳에 가면 내 글이 있다.

암튼 산중 턱에 있는 돌무더기들은그 당시 경북에서 가장 넓은 풍산 들을 지키려는 지방 토호세력들이 원시적인 싸움 전투에서 필요한 돌을 미리 준비 했을 것이라는 주측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이웃 마을과 투석전이 자주 일어 났던 나라이고 안동 K씨 씨족 동네와 산하나를 둔 00동 동민들도 실제로 그 산을 빼앗으려고 일제 말기 산 중턱에서 양쪽 동민들이 돌맹이 싸움을 하여 산을 빼앗아던 실화가 있다.

그 당시 돌맹이 싸움에 나섰던 00동민 들이 그 후에 그 산을 동산으로 등록 할 때 석전에 참가했던 총 12 가족이 이름을 공동으로 올렸다.

그런 돌맹이 전투 문화에서 그런지 ....

필자가 어릴적에는 어느 마을이고 어린 아이들이 싸워도 화가 나면 칼이나 몽두리를 들지 아니하고
돌맹을 들었는데...그 이유는 국토 아무 곳이나 돌멩이가 많았던 지리적 조건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특히 자갈 많은 강변 섶 마을 아이들은 그런 돌맹이에 싸움으로 머리 한 부분이 흉터 자국이 난 아이들이 제법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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