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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5-08-05 20:19:58
추천수 51
조회수   3,098

제목

홀로코스트

글쓴이

곽영철 [가입일자 : 2001-05-31]
내용

가나안(Canaan)의 홀로코스트(Holocaust)란 '불에 태워 신께 바치는 제물(Burnt Offerings)'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써, 토라(Torah, 모세 5경)의 출애굽기 32장은 고대 유대인들의 홀로코스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신 황금 송아지(golden calf)란 사실상 몰록(Moloch)을 의미하는 것으로, 머리는 송아지이나 몸은 화로(火爐)인 신입니다. 몰록은 바알(Ba’al)과 같은 신이며, 또는 바알과 그의 부인 아쉬타르테, 또는 님로드와 그의 부인 세미라미스를 말하기도 합니다. 이 두 신은 하나로 결합하여 남녀 양성의 신으로 등장하는데 그것이 비너스이며, 그 원래 라틴 이름은 루시퍼였습니다. 히브리 바이블 타나크(Tanakh)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몰록에게 인간 제물을 바치고 있습니다. 홀로코스트의 범인은 몰록의 현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시오니즘입니다.

 


몰록
Cabria (Giovanni Pastrone, 1914)
 

시오니스트들의 목표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하는 세계 정부와 세계 종교입니다. 그들의 숙원 사업인 '제3의 솔로몬 신전'을 세우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왕국'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투르크는 시오니스트들의 이스라엘 계획을 강력히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크립토 유대인 돈메(Donmehs)들로 구성된 프리메이슨 조직 영 턱스(Young Turks)의 무장 반란을 일으켜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의 오토만 제국을 무너뜨렸고, 영 턱스를 이끈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urk)가 터키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게 됩니다. 이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팔레스타인을 영국령(British Mandate)으로 집어넣었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팔레스타인을 잃고 싶지 않은 영국에게는 '이스라엘 프로젝트'를 완성시킬 강력한 이벤트가 필요했습니다.

 

전세계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집결시키기 위해, 바빌로니안 노예 몰이 기법(Babylonian Slave Driving Techniques)의 트라우마에 기반한 마인드 콘트롤 프로그램(Trauma-Based Mind Control Program)과 정교한 역사 왜곡 수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양떼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을 종교적 열정에 흠뻑 취한 광적인 시오니스트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인류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갖도록 몰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강력한 트라우마를 심어야 합니다. 고난이 없다면, 유대인들은 시오니즘에 끌리지 않을 것입니다. 전쟁의 책임을 씌우고 극한의 인플레이션을 만든 다음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배상금을 물리지 않았다면, 독일은 나치즘에 속지 않았을 것과 같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종교적 신념에 따라 그 동안의 생활 기반을 버리고 굳이 사막으로 가서 새로운 개척의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새 땅을 얻으려면, 기존의 거주민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과거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벌였던 학살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유대인들의 생존적 공포심을 자극하는 어떤 강력한 이벤트가 있다면, 그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05년 유대인들 때문에 러일 전쟁을 패했다는 것을 깨달은 제정 러시아의 짜르는 극도로 분노했다. 이어서 유대인들에 의해 시도된 첫 공산 혁명은 실패하고 말았다. 짜르 정부의 탄압 목표가 된 유대인들은 포그롬을 피해 독일로 망명했다. 독일은 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선대했다. 독일은 유럽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었다. 길거리에서 "쉐마 이스라엘! 우리 아버지!"라고 외쳐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반유대 감정이 없는 곳이었으며, 유대인들은 아무런 차별이나 제약없이 번성하고 있었다. AEG의 발터 라테나우, 증기 여객선 The North German Lloyds와 함부르크-아메리카 라인, 함부르크의 세계적 은행가 워버그 등 유대인들은 독일에서 잘 나가고 있었다. 오히려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 각 핵심 분야는 유대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가고 있었고, 특히 그 중에서도 경제와 언론이 가장 심했다." (벤자민 프리드만, Benjamin Freedman Speaks on Zionism)

 

"1차 대전 이후 독일에서 반유대주의 감정이 일어난 이유는 우리가 미국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패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독일은 루지타니아 침몰 사건 조작과 발푸어 선언을 핑계로 미국이 참전한 때문에 패했다." (1919년 시오니스트 나훔 소콜로프)
 

"18세기부터 오소독스와 프랑키스트들(유대교의 시오니즘 종파, 루시퍼 바알) 사이에는 거대한 마찰이 있었다. 에스겔 란다우(Ezekiel Landau)를 비롯한 당대 랍비들은 유대인들에게 홀로코스트가 떨어질 것을, 실제 사건 발생 시점보다 최소한 150년 이전에 예감하고 있었다." (랍비 마빈 S. 안텔만, To Eliminate the Opiate Volume 1, p.77)

 

"사바티안 프랑키스트들은 동포 유대인들을 극도로 증오했다. 히틀러를 만들어낸 것이 이들이다. 이미 18세기부터 Jacob Emden, Elchahan Wechsler, Zushya of Annapol과 같은 오소독스 랍비들은 프랑키스트들을 막지 않는다면, 무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나치에게 살해당할 유대인 12만명에 대한 구조 임무를 무산시킨 것은, 마이어란 이름의 두 유대인 즉 가스실과 화장 시설 개발자인 카톨릭 신학자 조세프 마이어(Joseph Mayer)와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살리 마이어(Saly Mayer)였다. 그리고 젊은 시온주의 운동 ’Shomer Hatzair’의 공산주의자 나단 쉬월브(Nathan Schwalb)도 그들과 함께 했다." (랍비 마빈 S. 안텔만, To eliminate the opiate Vol 2, p.207-211)
 

"이제 600만 유대인에 대한 희망은 이주에 모아졌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600만을 모을 수 있소?" ---- "힘듭니다. 저는 이 크나 큰 비극에서 젊은이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있는 분들은 그냥 가셔야 합니다. 그들의 운명입니다. 그들은 그냥 먼지입니다. 아주 작은 숫자만, 아마도 2백만 또는 그 이하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분들은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가셔야 합니다. 이 종말의 시대에 그들은 스스로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시오니스트 랍비 스티븐 와이스 Stephen S. Wise, 1938, ... 이승만은 그의 말투를 흉내냈다)

"시오니스트들이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2차 대전 이전에 독일로 쏟아져 들어온 오소독스 정교회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오소독스들이 새로이 창조될 이스라엘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독일을 떠나는 것도 허용치 않으려 했다. 이스라엘은 시오니스트들로만 가득 차야 했다. 그 와중에 1933년 랍비 스티븐 와이스가 선언한 '독일에 대한 성전'은 히틀러를 미치게 했고, 독일인들이 완전히 유대인들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11 사태의 최대 수혜자 Larry Silverstein)

"유럽 유대인들이 나치의 포로가 되어 있을때, 미국의 시오니즘 지도부는 고의적으로 히틀러를 도발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마자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세계적인 독일 상품 보이코트 운동을 시작했다. 1941년, 슬로바키아 랍비 바이스만델(Weismandel)이 아돌프 아이히만의 부관 디터 폰 비슬리체니(Dieter von Wissliczeny)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히틀러를 광분시킨 것은 시오니스트 랍비 스티븐 와이스가 전세계 유대인의 이름으로 선포한 '독일에 대한 성전'이다. 히틀러는 바닥에 굴렀고, 카펫을 차며 다짐했다. "이제 그들을 부수리라. 산산히 부수리라…" (제국과 시오니스트들은 히틀러가 광폭한 행동을 하도록 몰아갔다). 1942년, 히틀러는 반제 회담(Wannsee Conference)을 개최했고, 최종 해결안(final solution)이 모습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캐나다 유대인 헨리 매코우, Zionists Betrayed Non-Zionist Jews to Holocaust)

 

"몸값 지불, 조직적 저항, 구조 활동과 관련한 여러 시도들이 시오니스트들의 방해 때문에 좌절된 사례들이 너무도 많다. 게토의 어린이 사망률이 60%를 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의 오소독스들이 어린이들을 구하기 위한 식량 지원 프로그램을 시작하자, 시오니스트들은 보이코트 운동 위반이라며 막았다. 유대인들을 무장시키려던 블라디미르 자보틴스키의 계획도 무산시켰다. 난민들을 모리셔스로 보내려는 영국 의회 법안도 무력화시켰고, 대신 팔레스타인을 요구했다. 비슷한 미국 의회 법안도 무산시켰다." (랍비 모쉐 숀펠트)
 

"나치는 주덴라트(Judenrats,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 치안부) 운영자로 시오니스트들을 선택했다. 소위 유대인 경찰 또는 카포(Kapo)들이다. 나치는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그들의 동족들을 파괴로 몰 수 있는 충성스러운 지도자들을 찾아냈다. 나치보다 더 잔인한 지식인들이었던 시오니스트들은, 최종 목적지로 가는 열차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냈다." (랍비 모쉐 숀펠트)
 

"유대인 지도부들에게 아우슈비츠 지도를 보여 주며, 화장터로 가는 철로가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야 한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반시오니스트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 그들의 비밀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죽음의 열차가 공격받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나치는 중요 장비와 시설들을 화장터와 철로 근처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의무적 자살이라는 것은 솎아 내기이다. 피의 희생이라고 떠드는 것들은 인간 제물의 희생을 말한다. 시오니스트들은 반시오니스트들을 솎아 내기로 결정했다. 홀로코스트는 의무적 자살이었다." (랍비 바이스만델)
 

"매우 집중적인, 고의적인 구조 방해 노력들이 있었다. 단순히 힘있는 몇몇의 시도라고 볼 수는 없다. 모든 것들은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것들을 단순히 구조의 부족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학살 작전을 성공시키려는 고의적 행동들의 집합이었다. 희생자 숫자를 늘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은 영국이다. 영국군에 의해 최초로 희생당한 사람은 독일군이 아니라, 수송선 타이거 힐(Tiger Hill)을 타고 있던 유대인 난민이었다. 나치의 학살 작전에 협조했었던 연합국과 중립국들은 "유럽에 남아 있는 유대인들은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처벌받은 것은 오로지 나치의 일부분뿐이지만, 서방의 많은 지도자들도 뉘렘베르크 재판대에 서야 한다. 유대인 학살은 워싱턴의 작업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치를 집권시킨 것은 CFR이다. 특히 전쟁부 차관 존 J. 매클로이를 집중해서 보라. 매클로이는 록펠러의 변호사, World Bank 회장, 그리고 워렌 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윌리엄 R. 페를, The Holocaust Conspiracy)
 

"1933년 3월, 제국의 작업에 의해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의장으로 선출된 직후, 같은 달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32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나치의 선동에 위협을 느낀 유대인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이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갑자기 국경을 닫고 더 이상 유대인들의 미국 이민을 허용하지 않기 시작했다. 루스벨트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선택된 인물(the chosen one)이다." (짐 콘디트 주니어, Why Roosevelt closed the U.S. Borders to Jews in 1933)
 

"1939년 독일계 유대인 900명을 실은 세인트 루이스호가 플로리다로 들어왔지만 루스벨트는 정박을 허락하지 않았다." (헨리 매코우)
 

"당초 히틀러는 영국령 마다가스카르의 동쪽섬 모리셔스를 새로운 유대 국가로 제안했었다. 아랍의 반발을 고려해 하이파항에 도착한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았던 영국은, 히틀러의 제안에 따라 이들을 모리셔스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하가나(Haganah, 영국이 훈련시킨 시오니스트 게릴라 그룹, 현재 이스라엘군 IDF)는 "팔레스타인이 아니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40년 11월 25일, 유대인 1,800명을 태운 여객선 파트리아가 모리셔스로 출발한 직후, 하가나가 매설한 폭탄이 터졌다. 파트리아는 침몰해 버렸고, 267명이 수장되었다. "팔레스타인이 아니라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는 유대인들의 자살이었다"고 주장했었던 하가나는, 결국 그들을 모리셔스로 보내기보다는 여객선을 날리는 것을 선택했다고 인정했다. 이 사건을 두고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역사에 우연은 없다"라고 말했었다." (헨리 매코우, Nazi Collaborators, Zionists Don't Represent Jews)


 

"이러한 사건들은 유대인을 원하는 나라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절망감을 심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만의 고유한 영토의 필요성에 대한 간절함을 창출하려는 심리 작전이었다." (헨리 매코우)

 

"1933년 하바라 이주 협정 이후 나치가 발행한 기념 주화에는 ’스와스티카’와 ’다윗의 별’이 양쪽에 각인되어 있었다. 클라우스 폴킨의 1976년 저서 〈The Journal of Palestine Studies〉에 의하면, 1936년 유대인들을 싣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던 선박의 마스트에도 ’스와스티카’가 그려진 깃발과 ’다윗의 별’이 그려진 깃발이 동시에 게양되어 있었다. 나치즘과 시오니즘은 데칼코마니이다." (에드윈 블랙, The Nazi-Zionist Connection - Shocking Hidden History)


 

"1938년, 프랑스 에비앙에서 나치로부터 탄압받는 유대인들의 안정적 정착을 논의하기 위한 31개국 국제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는 참석을 거부했다. 유대인들이 유럽 정착에 성공한다면, 팔레스타인으로 가려 하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존 퀴글리)
 

"이스라엘에는 최소 천만의 유대 영혼들이 살아야 합니다." (초대 이스라엘 총리 데이비드 벤 구리온, The Watchman)

 

"19세기말이 될 때까지 시오니즘은 단지 몇몇 유대인 엘리트들만 동조했을 뿐, 순전히 백인 앵글로 색슨 청교도들(White Anglo Saxon Puritans, WASP)의 프로젝트였다. 토라(Torah, 히브리 바이블, 모세 5경)를 신화나 풍자로 해석할 뿐, 정치적 계획으로 해석하지 않는 당대의 랍비들은 이 운동을 매우 강하게 비난했다. 따라서 시오니즘에 관심이 없는 대다수 유대인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한 이벤트들이 필요했다. 1917. 11. 2 발푸어 선언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이행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영국 외상 발푸어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 국가 창조를 약속하는 공개 편지를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냈다. 1918년 1월 8일,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제출한 미국의 참전 목적 14개 중 12번째 항목으로 이스라엘의 창조를 포함시켰다. 따라서 원래 이스라엘을 창조하려는 결정은 약 20년후 2차 대전 과정에서 발생한 유럽 유대인들의 파괴와는 관련이 없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에게 고향땅을 제공하기 위한 유대인 구하기 운동이 아니다. 그들을 제국주의에 동원해 앵글로 색슨의 승리에 이용하려는 것이다. 시오니즘은 유대인 문화가 아닐뿐 아니라, 시오니스트들은 대부분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의 배후에는 John D. Rockefeller, J. P. Morgan, Cyrus McCormick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티에리 메이상, Who is the Enemy?)

 

"아무리 강력한 독재자라도 그가 지배하는 나라의 모든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한다. 히틀러가 로스차일드의 일원인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시오니스트들의 음모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을 창조하기 위해 홀로코스트를 이용하려는 그들의 거대한 음모를 알지 못했던 히틀러는, 포그롬을 피해 독일로 몰려와서 부를 독차지한 유대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을 I.G Farben의 강제 노역에 동원하기 위해서 수용소를 운영했을 뿐, 가스실 등의 세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였다. 강제 수용소는 알려진 것보다는 좋은 환경이었다. 수용자들은 1877년 인도 기아 사태나 1943-44 벵갈 기근 당시 영국이 운영한 강제 수용소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았다. 오히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사유했던 중앙 은행들을 국유화하는 등 로스차일드가 장악한 유럽의 금융 시스템들을 무력화시켰으므로, 로스차일드 도당으로부터 독일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연출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러시아 정교회 나다나엘 카프너, Auschwitz Makes The News!)
 

"그들의 바램과는 달리, 문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정치적 영토가 유대인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던 것에 있었다. 랍비들 대부분은 시오니즘이 유대 문화가 아니며, 이교도 문화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새로운 개척의 삶을 시작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도덕적으로도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938년 11월 9일, 크립토 유대인 메이슨들에 의해 만들어진 크리스탈나하트 사건은 유대인들을 공포로 몰았다. 그것은 "유럽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니 떠나라"는 메시지였다. 그래도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숫자는 기대에 못미쳤다. 유대인들은 나치가 아무리 탄압하더라도 독일에서 사는 것을 더 선호했다. 사막에 가려 하는 숫자는 적었고, 유대 국가를 수립하기에는 숫자가 부족했다. 따라서 무언가 유대인들을 몸서리치게 만들 더 강력한 어떤 심리적 트라우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리스토퍼 욘 비예르크네스, Secrets of the Tribe of Sabbatean & Frankist Crypto Jews)
 

"팔레스타인을 점유하기 위해서는 주민이 필요하다. 로스차일드는 영국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유대인 영토를 만들려 하고 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면 되는데, 왜 꼭 그들을 죽여야 했을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원하는 건 자신이라는 인식을 남기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유대 국가를 원하는 건 유대인들 자신이어야 한다. 학살의 트라우마가 있어야만 유대인들 스스로 이 땅을 붙잡고 늘어질 강력한 시오니즘 지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약속된 땅을 만들어준 로스차일드를 고맙게 여길 것이다. 로스차일드는 구세주로 비춰져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침략이 마치 종교적 갈등이나 유대인 문제인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이스라엘의 아랍 공격은 유대인들의 작업인 것처럼 비춰질 것이다." (헨리 매코우, "Are Jews being set up for Anot?")

"트라우마를 심기 위한 최고의 수법은 집단 학살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이나 9-11 같은 대형 이벤트들은 인류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입하기 위한 심리 작전이다. 세상 전체를 속이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도 마찬가지이다. 홀로코스트 이후 세상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영토가 주어져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사탄의 수법이다." (헨리 매코우, The Holocaust as Trauma Brainwashing)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서 하나로 뭉치지 않으면 멸종할 수 있다는 생존적 공포심을 창조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발푸어 선언을 실현시킨 히틀러는 이스라엘 건국의 실질적 아버지이다. 사실 시오니스트들은 히틀러를 고마워 한다."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 역사학자 일란 파페, Israeli Myths & Propaganda)

 

"히틀러리즘은 모든 유대인들을 시오니스트로 바꾸는 우리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시오니스트 지도자 나훔 소콜로프, 1933, Hitler Was a Godsend to Israel)
 

"1932년 히틀러의 정책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 이전에 이미 그는 시오니즘을 지원했습니다. 히틀러 자신이 시오니스트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비판할 때에는 인종주의라는 비판을 받지 않지만, 똑같은 이유로 이스라엘을 비판할 때에는 인종주의 또는 반유대주의라고 비난받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반유대주의인지 알아야 합니다." (전 런던 시장 켄 리빙스톤, Hitler supported Zionism)
 

"토라(히브류 바이블, 모세5경)의 계시는 "이스라엘이 세워지기 위해서는 유대인 6백만을 신께 돌려 보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가 Tom Segev가 "6백만이라는 숫자는 홀로코스트 전설을 이스라엘 신앙으로 만들기 위한 시도이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 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계시에 의하면 6백만은 화로(火爐)에서 사라져야 하며, 그래야만 법적 정당성을 가진다." (래리 실버스틴)

 

"BC 1세기 유대인들은 토라와 경전들에는 암호화된 메시지와 숨겨진 뜻이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숨겨진 뜻을 찾는 방법으로는 게마트리아(Gematria)가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다른 언어들과 달리 히브리어는 별도의 숫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각 단어는 숫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각 글자를 숫자로 변환시켜 본 카발리스트들은 그 숨겨진 뜻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 해석 방법은 다양한 종파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Wikipedia, Kabbalah)
 

"6백만과 관련하여 알아야 할 것은 토라의 계시에 "돌려 보내야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는 숫자를 표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시에서 V 또는 VAU는 빠져 있다. V는 숫자 6을 뜻한다. 종교학자 Ben Weintraub는 빠져 있는 글자의 뜻이 숫자 6백만이라는 것을 랍비들로부터 배웠다. 그렇다면 계시는 다음과 같이 읽힌다. "신께 돌려 보내야 한다. 그러나 6백만 이하로." (래리 실버스틴)
 

"유대인들이 약속된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6백만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야훼(YHWH)는 이것을 죄인들의 영혼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으로 본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에서 유대인의 영혼은 반드시 깨끗해야 하며, 그 청소는 화로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Ben Weintraub, 유대교의 홀로코스트 교리, 코스모 출판, 워싱턴 1995, p3)

"홀로코스트는 불에 태워 신께 바치는 제물(burned offerings)을 뜻한다. 간단한 결론이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면 유대 국가는 성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 가스를 마신 600만이 화로에서 사라진다면, 계시는 완성되고 이스라엘은 적법한 국가가 된다." (로버트 B. 골드만)

"어느 나라나 자신의 영토를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히틀러로부터 받는 고난이 바로 그 희생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잔인한 이 세상에서 경제적 먼지에 불과합니다. 앞으로 다가올 홀로코스트에서 살아 남을 유대인은 2백만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살아갈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초대 이스라엘 대통령 하임 바이즈만, 1936년 세계 시오니스트 대회 연설, Secret History of Sabbatai Zevi Messiah of 1666)

 

"시오니즘 운동은 유럽 유대인들을 홀로코스트로 희생시킨 이 범죄의 협력자였다. 그들의 목적은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에 채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낼 수 없는 사람들은 그냥 사라지는 편이 나았다. 선전 효과로라도 써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Yossi Schwartz, 2003)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야기들은 트라우마에 기반한 세뇌 작업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유대인 지도부는 나치와 협력했다. 팔레스타인과 중동을 정복하기 위해 필요한 도덕적 권위를 이스라엘에게 부여하기 위해서 시오니스트와 나치의 공모는 비밀에 부쳐져야 했다."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 The Holocaust as Trauma Brainwashing)
 

"홀로코스트는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을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팔레스타인을 강점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이 필요했다. 시오니즘은 토라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시오니스트들은 절대 유대 사회를 대표할 수 없다." (랍비 야코프 샤피로, The Real Reason that Netanyahu and Israeli Leader's Claim to Speak for All Jews)
 

"헝가리의 시오니스트 지도자 루돌프 카스트너(Rudolf Kastner)는 친위대장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과 특별한 계약을 맺었다. 선별된 유대인 1,700명을 팔레스타인으로 보내는 대신, 오소독스 유대인 46만명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카스트너의 행동은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1957년, 비밀을 감추기 위해 카스트너는 살해되었다." (헨리 매코우, Nazi Collaborators, Zionists Don't Represent Jews)
 

"신에게 바치는 이스라엘의 한 마리 양은 유대인 전체 디아스포라보다 더욱 가치가 있다." (홀로코스트 희생자 구조 위원회 이츠하크 그린바움 위원장)

 

"때로는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일부를 희생시키는 것도 필요합니다." (전 이스라엘 총리 모쉐 샤렛, Were Hitler & Nazism Zionist Creations?)

 

"2차 대전은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기 위한 시오니스트들의 계략이었다. 그들은 시오니즘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 유럽 전체 유대인들을 제물로 바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창조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했지만, 홀로코스트와 세계 대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목표였다. 유럽 왕족과 유대인들은 최대한 크게 만들기 위해 양쪽을 모두 지원하였다. 누가 이기던 승자와 패자 모두 빚에 허덕일 것이며, 그들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증오심이며, 유대인에 대해 늘어가는 증오심은 시오니스트들이 만들어 낸 것들이다." (Joseph Burg, The Toronto Star, March 31, 1988)
 

"나치의 임무 중 하나는 이스라엘을 창조하는 것이다. 뉘렘베르크 재판대에 선 헤르만 괴링은 60년 안에 자신을 기리는 동상이 이스라엘에 세워질 것이라고 자신했었다. 히틀러의 임무는 유럽과 러시아를 파괴한 후에, 미국에게 패전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적적인 것들을 성취해냈다. ①유럽에서 반시오니즘 유대인들을 모두 없앴다. ②유대인들을 비난하지 못하도록 홀로코스트라는 방패를 창조해냈다. ③중동을 장악하기 위해 필요한 이스라엘의 창조를 가능하게 했다. ④마치 유대인들을 반대하는 것처럼 독일인들을 속임으로써 독일과 유럽 파괴에 성공했고,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이 완전히 유럽 왕족과 유대 자본의 통제 하에 들어가는 시나리오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I.G Farben 회의실에서 수립되었던 나치의 제3제국 계획은 현재의 유럽 연합으로 수정되었다. 유럽의 트로이카 유럽 연합, 유럽 의회, 유럽 중앙 은행의 설립은 히틀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헨리 매코우, Hitler Was a Godsend to Israel)

 

영국 프리메이슨리가 아니었다면 현대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1860년, '영국-이스라엘 운동'이 시작된 건 프리메이슨리 때문이다. 그들의 목적은 당시 오토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유대-메이슨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일정 시점에서 투르크와 거래를 터야 하는 문제였고, 거주민들을 유대인들로 대체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의 아이디어는 이미 예루살렘 등지에서 살고 있던 종교적 유대인들을 불러 모으는 것과 같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언젠가는 메이슨의 역사 관점을 받아들일 유대인들을 원했다. 처음에는 로스차일드나 몬테피오레(Montefiores) 같은 프리메이슨 유대인 가문들이 이주의 물결에 사용되는 기반 시설을 짓기 위한 자본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의 자금 제공만으로는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유혹하기는 매우 힘들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아무리 반유대주의 선동과 이스라엘 운동을 벌여도 유대인들은 떠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유대인들은 유럽에서의 생활을 더 선호했다. 따라서 유럽은 유대인들에게 악몽의 장소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포그롬과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이유이다. 비록 시오니즘 지도자 티어도어 허즐(Theodore Herzl)이 영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것도 분명하지만, 메이슨 국가를 원했던 진짜 주체는 허즐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1905년, 허즐은 미심쩍은 이유로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 이후 이 운동은 하임 바이즈만(Chaim Weizmann)의 비도덕적 지도하에 영국 수중에 떨어졌다. 그 때부터 작전은 신속히 진행되기 시작한다. 1차 대전 동안,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또는 허버트 사무엘(Herbert Samuel) 같은 영국 메이슨들이 유대 영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려는 영국의 캠페인을 이끌었다. 동시에 유럽의 참호 속에서 싸워야 할 영국군 백만명이 오토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으로 보내졌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유대 국가 캠페인은 베르사이유에서부터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1919년, 런던에 RIIA (The Royal Institute Of International Affairs 채텀 하우스)가 설립되었고, 2년후 뉴욕에서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이 그들의 가증스러운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아젠다는 세계 정부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종교이다. 유대인들은 이게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영국의 속임수가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방지할 수 있었던 프리메이슨 윈스턴 처칠은 오히려 돕기를 거부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 '평화 중재자'와 영국 프리메이슨간에 수없는 비밀 회담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결과는 모두가 보고 있는 것과 같다. (Barry Chamish, British Freemasonry Covets Israel)

"구조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건국자들이 아우슈비츠에 가서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우리는 부다페스트 벙커에서 홀로코스트를 버텨냈습니다. 오로지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거대 규모의 유혈 사태만이, 전후 승전국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선물의 하나로써 이스라엘을 얻으려는, 그들의 목적 성취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전략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반유대주의를 선동했고, 구조 노력들을 무산시켰습니다. 모든 것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시오니스트들의 추모 행사는 희생자들의 기억에 대한 모독일 뿐입니다." (오소독스 랍비 Moshe Dov Beck)

"반유대주의에 대한 이스라엘의 불만은 이중적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그들의 잔학상이 반유대주의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연히도 그들은 반유대주의로부터 이득을 얻고 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거세질수록,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의 숫자는 늘어납니다." (오소독스 랍비 Dovid Feldman)

"그들은 유대인과 유대교를 대표하는 것이 시오니즘인 것으로 세상이 믿기를 원합니다. 물론 틀린 말입니다. 시오니스트들은 그들의 사악한 행동들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불행히도 모든 유대인들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유대인과 유대교를 같은 하나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위험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유대인들의 구세주로 포장합니다. 토라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작정(作定)에 의해 유수(유랑, 망명)하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것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 끈기있게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간의 개입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땅을 훔치거나, 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살해하고 쫒아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우리는 관용을 배워야 하며, 타인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난을 타인을 탄압하는 구실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오소독스 랍비 Yisroel Dovid Weiss, Anti-zionist rabbis call Israeli ceremony at Auschwitz an affront to the memory of the victims)

 

"유대의 리더쉽을 시오니스트들에게 빼았겼다. 그들은 우리의 믿음을 배반했고, 윤리를 능욕했다. "유대인들의 피는 유대 국가의 바퀴를 돌리기 위해 필요한 윤활유일 뿐이다"라는 시오니스트들의 접근 방법은 과거의 일이 아니다. 오늘 이 순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는 오히려 시오니스트가 다수이며, 전세계 모든 곳에서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은 유대인의 적이다." (랍비 모쉐 숀펠트, Holocaust victims accuse Zionists)

 

"공산주의를 강력히 지지하는 아쉬케나지 유대인들은 나치 스타일의 파시즘도 선호한다. 그들은 뉴 월드에서 누릴 수 있는 그들의 특권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시오니즘을 너무도 좋아한다. 2차 대전 기간 동안, 독일의 유대인 엘리트들은 게쉬타포와 긴밀히 협력했다. 그들은 동포 서민층들을 탄압했고,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이제 이스라엘에 사는 이 엘리트들은 나치 파시즘의 많은 요소를 이스라엘에도 적용하고 있다." (Jack Bernstein, An American Jew in Racist Marxist Israel)
 

"지난 23년간 이스라엘이 한 모든 것들은 악마스럽게 멍청한 짓이거나 아니면 멍청하게 악마스러운 짓들이다. 이스라엘은 점점 나치화(inevitable Nazification)되어 가고 있다. 이스라엘은 주데오-나치(Judeo Nazis)라고 불려야 한다." (예샤야후 리바비츠 Yeshayahu Leibowitz 예루살렘 히브류 대학, Israeli policy as evil stupidity)

"홀로코스트는 트릭입니다. 매우 편리한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소리가 나온다면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끄집어 냅니다. 우리의 여러 기관들은 매우 강력하고, 또 돈도 많습니다. 특히 이스라엘과 미국의 유대인 조직들은 매우 긴밀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파워풀하고, 재능있는 사람들도 많고, 언론에도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우리는 홀로코스트를 얘기하고, 유대인의 수난을 떠들면서 반유대주의라고 공격합니다. 이보다 효율적인 것은 없죠. 흠.. 뭐 그런거죠. 이 모든 것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해 이스라엘이 하는 것들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Shulamit Aloni, AntiSemitism and Holocaust Are Tools Against the Facts)

"홀로코스트는 살인 산업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 지도부들은 홀로코스트로부터 거대한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사실 그들이 번 돈은 동포 유대인들의 학살에서 얻은 것입니다. 진정한 반유대주의자는 그들입니다." (노만 핑클스틴, The Holocaust Industry)

"나치당은 영국과 미국의 지배 써클에 의해 창조되었다. 아메리카의 유력 가문들이 히틀러를 지원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남아있는 유대인들은 모두 없애겠다고 했었다. 유대인 학살이 계획이었다는 것은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을 이용해 예루살렘을 차지하려는 속임수이다. 시오니즘은 유대인들에 대한 비밀 전쟁이다...... 미국인들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을 지지하도록 유도되고 있고, 미국인들이 납부한 거액의 세금이 매년 이스라엘로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아랍 석유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미국의 장기 전략이다. 아랍에는 석유가 많지만 이스라엘에는 없다. 이스라엘이 아랍을 공격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간단하다. 국무부나 정보 기관들은 이스라엘도 지원하지만, 이스라엘과 싸우는 무슬림들도 비밀히 지원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랍을 증오해야 하고, 아랍은 유대인을 증오해야 한다. 끊임없는 갈등이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가능하게 해준다." (전 미 법무부 검사 존 로프터스, Holocaust Remembrance "America"s Nazi Secret" "The Secret War Against the Jews")

 

"1950년, 이라크의 유대인 나임 길라디(Naeim Giladi)는, 이라크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 대한 폭탄 테러의 두려움 때문에, 이스라엘로 이주하게 되었다. 길라디는 BC 600년 바빌론 유수 당시부터 이 지역에 존재해왔던 유대인 공동체 일원이었다. 1940년대, 이라크 수상 누리 엘 사이드(Nouri-el-Said)는 갑자기 반유대주의 레토릭을 펼치면서 유대인 공무원들을 해고하기 시작했고, 유대인들의 사업 면허도 취소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50년이 되자, 유대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해 버렸다. 하지만 막상 이라크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 후부터 갑자기 유대교 회당 시나고그를 겨냥한 폭탄 테러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폭탄 테러는 효과가 있었다. 그 이후 매일 600~700명 이상 이라크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떠나는 이주의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52년이 되자, 6천명을 제외한 유대인 12만 5천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길라디도 이 중의 일부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라크 뿐만 아니라 아랍 전역에서 일어나, 유대인 50만명 이상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무슬림에 대한 극단적 증오심을 가지게 된 길라디는 시오니즘에 빠져들었고, 무장 단체 하가나(Haganah, 현재 이스라엘군)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아랍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그러나 어느 날, 길라디의 생각을 바꾸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우연한 기회에 이스라엘 수상 데이비드 벤 구리온을 만난 길라디는, 그로부터 많은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길라디는 그 동안의 모든 것이 사기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라크 수상 누리 엘 사이드가 반유대주의 정책을 펼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사이드는 영국의 꼭두각시였다. 그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벤 구리온과의 합의 이후에 펼쳐졌다. 1948년, 비엔나에서 벤 구리온을 만난 사이드는, 아틀란티스트들의 지정학적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라크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기로 합의했었다. 1992년, 길라디는 그의 저서 [벤 구리온 스캔달, 모사드와 하가나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이유는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라크에서 발생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폭탄 테러는, 이스라엘에 의해 저질러졌다." 결국 길라디는 이스라엘 국적을 포기하고 뉴욕으로 이주해 버리고 말았다." - Henry Makow, "Fake Terror is Oldest Trick in Zionist Toolbag"

 

Read more at : Zionist role in 1950 attacks on Iraqi Jews 'confirmed' by operative and police re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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