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통킹만 사건'과 본격적인 '월남전 개전'의 50주년이다. 1961년부터 1975년까지 계속되었던 이 전쟁은 미국에서 거대한 좌파 시위자를 양산했고, 그에 따른 '반정부 문화'는 여기에서 기원한다. 언론은 이 전쟁을 공산주의 확장을 저지하려 했던 '매파 극우주의자'들이 만든 '수렁'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미군이 호치민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했기 때문에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으며, '매파'들이 자랑스럽게 미군을 끄집어 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론에서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월남전의 기원은 2차 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더 이상 인도차이나 반도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100% 동의한다고 말했다.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를 없애는 것이 일루미나티의 전후 전략이었다. 그래야만 강력한 주권 국가였던 유럽 국가들이 약해질 것이고, 각 유럽 국가들을 유럽 경제 공동체(Common Market)에서 형태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던 유럽 연합의 단순한 지방 정부로 서서히 전락하도록 만드려는 것이었다.

Ho Chi Minh w/ OSS, 1945
원래 미국은 호치민을 지원했었다. 1945년, CIA의 전신이었던 전략 사무국 OSS는 호치민의 공산군을 조련했고, 프랑스와의 독립 전쟁에 사용될 총기류와 탄창 2만개를 지원했다. 당시 미국은 호치민을 찬양하고 있었고, 1946년판 〈뉴스위크〉는 호치민을 조지 워싱턴에 비유하기도 했다.
1954년, 프랑스는 중요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호치민의 병력에 포위되었다. 프랑스는 미국의 참전을 구걸했다. 단 한 번의 공습만으로도 공산군의 포대를 파괴하고,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CFR 창립 멤버, 록펠러 인척, 유엔 헌장 초안자)는 질질 끌었고, 결국 미국 정부는 프랑스의 요청을 거부했다.
바오다이 황제 제거
프랑스의 패퇴와 철수가 이어지고, 베트남을 17선으로 분단한 후, 미국 해외 정책의 다음 목표는 통일의 구실이 될 수 있는 바오다이 황제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바오다이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미국이 나를 몰아내기 위해 사용한 자금의 1/1000 만이라도 나에게 주었더라면, 우리가 이길 수 있었다."
조작된 국민 투표를 통해 외교협회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자산이었던 응오 딘 디엠이 남베트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7년, 미국을 방문한 디엠은 데이비드와 존 D. 록펠러 형제가 주최한 뉴욕 태리타운의 점심 만찬에서 환영받았고, 다음 날 록펠러의 사립 띵크탱크 CFR에서 연설했다. 디엠의 폭압적 정책은 남베트남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싫어하도록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 품 안으로 몰아냈다.

아이젠하워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영접을 받는 응오 딘 디엠
디엠에게 달라 붙은 인물은 CIA 대령 에드워드 란스데일이다. 란스데일은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레 반 비엔의 사병 조직 등 강력한 3개의 반공산주의 그룹을 무장 해제하고 무력화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Hilaire du Berrier의 〈Vietnam: Background to Betrayal〉과 그의 정보 보고서에 잘 기술되어 있다. 호치민을 지원한 후, 그의 반대 세력 즉 프랑스, 바오다이 황제, 반공 그룹들을 모두 제거한 후에, 이제 CFR은 비극적인 전쟁을 만든다.
1961년, 사실 확인 임무를 마치고 베트남에서 돌아온 국무부 월트 로스토우의 조언을 들은 케네디 대통령은 첫번째 전투 부대 파병을 인가한다. 언론은 로스토우를 극우 매파로 묘사했지만, 사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막시스트 혁명가였으며, 이모 2명은 미국 공산당원이었고, 그의 형 Eugene Debs는 사회당 당수의 이름을 딴 이름을 가졌으며, 아이젠하워의 국무부는 안보상 이유로 로스토우를 3번이나 거부했었다. 국무부 안보 수장 Otto Otepka를 해고한 케네디 행정부만이 로스토우를 받아들였다. William J. Gill 의 저서 〈오토 오테프카의 시련〉을 보라.
통킹만 사건
월남전은 '통킹만 의결안' 통과로 시작되었다. 1964년 8월 4일, 월맹의 어뢰를 맞은 미국 전함 USS 매덕스 침몰이 그 이유였다. 이것은 오늘날 '가짜 깃발 공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당시 통킹만에 주둔하고 있던 파일럿은 의회로부터 명예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던 제임스 스톡데일이었다. 사고 직후, 1시간 반에 걸쳐 해당 지역을 정찰 비행한 스톡데일은, 그 어떤 월남 선박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것은 그의 회고록 〈In Love and War〉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회고록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거짓 구실을 통해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실체적 증거와는 무관하게 명분 만들기에만 집중하는, 분별없는 워싱턴 관료들 통제하에 있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정찰 비행에서 돌아온 제임스 스톡데일. "아무 것도 없던데요?"
극동 담당 차관 William P. Bundy (CFR, Skull & Bones)는 침몰 사고가 일어나기도 전에 '통킹만 결의안'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었다. 언론에서는 '극우 매파'로 불렸지만, 번디는 1950년대 소비에트 스파이 앨저 히스의 변호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물론 히스는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1940년대 FBI가 소비에트 도청 자료를 해독한 '베로나 파일'을 공개함으로써, 그의 유죄는 입증되었다. 번디가 국무부를 떠나게 되자, 데이비드 록펠러는 그를 CFR 저널 〈Foreign Affairs〉편집자로 임명했다.
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었지만, 현명한 사람들이라는 비밀 파벌이 존슨 대통령의 전쟁 개시를 떠밀었다. 이 일당 14명 중 12명이 CFR 이었다. 이 모임은 그 일원들이었던 월터 아이삭손과 에반 토마스의 〈The Wise Men〉에 기술되어 있다.
전쟁을 요구했던 '현명한 사람들'의 지도자는 록펠러맨 딘 애치슨이었다. 미국이 소비에트 연방을 인정했던 1933년 이전, 스탈린은 미국에서 소련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젊은 법률가 애치슨을 선택했다. 트루만의 국무장관 시절, 애치슨은 잘 알려진 스파이이자 국가 안보의 위협이었던 John Stewart Service, John Carter Vincent, Lauchlin Currie 같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둘러쌓여 있었다.
심지어 애치슨은, John Stewart Service가 공산주의자 스파이에게 정부 기밀 자료를 건네준 혐의로 FBI에게 체포된 이후에도 그를 지원했다. 1940년대 후반, 폴란드의 공산 신정부는 미국의 인정을 얻기 위해 애치슨의 로 펌을 고용했다. 애치슨의 동료는 소련 스파이 앨저 히스의 형제 도날드 히스였다. 애치슨 그 자신 역시 William P. Bundy의 장인이다! 애치슨의 소규모 일당이 미국을 전쟁으로 몰아갔고, 그들은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던 "Archie Bunker" 유형의 우파가 아니았다.
1950년, 애치슨은 '애치슨 라인'을 그어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킨 전력이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의 제국주의적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한 것이 월남전이다.
1968년, 갑자기 180도 태도를 전환한 '현명한 사람들'은 존슨 대통령에게 월남전은 실수였다고 알린다. 인기없는 전쟁을 치루도록 홀로이 남겨진 와중에 이 같은 배신에서 오는 비통함 때문에, 존슨은 재선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민주당은 충격에 빠졌다. 존슨의 후임으로 들어온 닉슨 대통령 역시 이 전쟁을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얻어맞고 쫒겨나고 말았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은 2개의 전선에서 싸웠다. 유럽과 태평양이다. 우방들의 도움으로, 강력한 독일과 일본을 3년 반만에 패퇴시켰다. 하지만 월맹군과 싸우는 데에는 14년이 걸렸고,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옳은 것이다.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는 전략적 요충지 공습에 대한 공군의 요청을 90% 이상 무산시켰다. 공로를 인정받은 맥나마라는 국방부를 떠난 후 월드 뱅크 회장직을 부여받았다. 후일 맥나마라는 그의 자서전에서 "통킹만 사건은 거짓이었다"라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1985년에야 기밀 해제된 26쪽 짜리 의회 보고서의 '월남전 교전 수칙'에 의하면, 미군 병사는 선제 사격이 금지되었고 공격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만약 파일럿이 지상에 있는 미그기를 발견한다 해도 공격할 수 없었다. 미그기가 이륙하고 적대적 의도를 보인 후에야 공격할 수 있었다. 지대공 미사일 발사대를 건조하는 현장을 발견하였더라도 폭격할 수 없었고, 가동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월맹군 보급 통로였던 '호치민 트레일'로부터 200 야드 이상 떨어져 있는 트럭은 폭격할 수 없었다. 미군기의 접근을 레이다로 파악한 월맹군 트럭들은 잠깐 트레일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간단히 공격을 피할 수 있었으며, 미군기가 지나간 후 보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만약 미군이 그 같은 제한속에서 싸워야 했다면, 2차 대전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68년 3월, 〈Science & Mechanics〉는 로이드 말란이 열 몇명 미군 고위 장교 은퇴자들과 했던 인터뷰를 싣고 있다. 그들 모두, 엄격한 제한이 없었다면 수 주 혹은 수 개월 내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들이 추천한 승리 전략 중의 하나는; (1)전쟁 선포, (2)즉각적인 북침과 결정적 전략 목표 폭격, (3)월맹군 보급의 90%를 담당하는 하이퐁항 봉쇄, (4)호치민 트레일 봉쇄였다. 그들의 모든 조언이 무시되었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미국을 전쟁에 끌어 들인 이 일당들이 미군의 승리를 방지하는 규칙들을 만들어낸 것을 보면, 월남전은 '수렁'이나 '실수'가 아니며, 본국에서의 혁명과 마찬가지로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이 분명하다. James Kunen은 〈The Strawberry Statement: Notes of a College Revolutionary〉에서 '1968년 반전 운동'을 이끌었던 민주 사회 학생 연맹 SDS 연차 회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국제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서 온 사람들은 몇몇 급진주의자들을 포섭하려 시도했다. 그들이 SDS 연차 회의의 후원자들이었다. 이 비즈니스 맨들은 세계 유수의 산업가들이며, 우리의 삶이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서 회의를 개최했다. 그들은 지배 계급의 좌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시카고 시위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우리 역시 록펠러 자금을 제공받았다. 그들은 우리가 더 많은 급진적 사회 소요를 만들어 내길 원했고, 공산주의 정책을 만드는데 이용했다."
민주 사회 학생 연맹 회원이자 공산당원인 제리 커크는 상하원 안보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좌파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록펠러나 포드 같은 거부들에 대항해 싸우고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며, 그들로부터 자금을 받고,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이 미국 국기를 태웠을 때, CFR의 주요 목적이 달성되었다. 그 목적이란 세계 정부의 필수 전제 조건인 '애국심의 파괴'이다. 어째서 주류 언론은 이것들을 보도하지 않는가? 1971년, John Rarick 의원은 말한다.
"어째서 펜타곤이 설립한 CBS는 CFR에 대해 보도하지 않으며, 월남전 실패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누구에게 돌려야 하는지 대중들이 결정하도록 하지 않는가? .. 무대 장치(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커튼 뒤의 무대 장치 관리자, 미국의 정책을 배후에서 결정하는 연방 준비 은행 소유자들을 말함)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정부도 조종하고 있다는 진실을 누가 말할 것인가?"
원문 : Vietnam: How The War, The Defeat, and The Revolution at home were orchestr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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