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 일루미나티 아젠다를 위해 창조된 갈등
2차 대전에서 미국은 2개의 전선에서 싸웠다. 유럽에서는 독일과 싸웠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싸웠다. 소련은 이 전쟁에서 미국의 우방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과만 싸웠고, 일본과는 불가침 조약을 지켰다. 소련은 2군데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할 만한 여력이 없었고, 나치와의 싸움에만 전력하는 한편 2번째 전선에는 끌려들어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미국의 목적은 소련을 끊임없이 전쟁에 끌어들여 소모시키는 것이었다. 나치 패망 이후의 세계 정세를 논의하기 위해, 전리품 배분을 합의하기 위해, 열렸던 테헤란과 얄타의 "빅3" 회담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주문했다. 스탈린은 동의했다. 소련 극동군의 원정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차량, 물자를 미국이 지원해주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터무니없이 결정된 해외 정책이었다. 2차 대전의 공식 개전이었던 1939년 폴란드 침공은 사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의 연합 공격이었다. 1940년, 스탈린은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를 침공했고 루마니아를 병합했다. 스탈린은 전쟁이 끝나기 5일 전까지 극동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국으로 들어간 소련군은 매우 제한적인 전투끝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고 막대한 무기고를 차지했다.
CFR과 신탁 통치
이 전에 한국은 일본의 보호령이었다. 1944년 4월,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저널 〈Foreign Affairs〉의 글 "전후 세계의 한국"은 러시아와 함께 한국을 신탁 통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스탈린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북한을 얻었고, 미국은 나머지 절반을 얻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이 새로운 국제 기구가 임무를 적시에 수행할 수 있을까? 저자에게는 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특정 국가들의 신탁 통치보다는 권력 집단 즉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에 의한 신탁 통치의 가능성은 있다." - 〈Foreign Affairs〉
태평양 전쟁에서 소련이 거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음을 감안할 때 스탈린에게 북한의 취득은 거대한 성공이었다. 스탈린은 재빠르게 김일성 정권을 수립했고, 15만 병력과 수백대의 탱크, 전투기, 대포를 가진 군대를 만들었다. 반면 미국은 가진 것이라곤 소형 화기 뿐인 남한인 경찰 병력 1만 6천 정도만 남겨 놓고 떠났다.
사탄의 함정 : 애치슨 라인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인물중의 하나인 국무장관 딘 애치슨(Dean Acheson, CFR, Scroll & Key)은 일본에 경제 제재를 부과하고 유조선을 나포함으로써 진주만 공격을 유도했던 전력이 있다. 1950년 1월 12일, 딘 애치슨은 마치 김일성에게 무언가 선물을 주려는 것 마냥 "남한은 극동에서 미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다"고 연설한다. 애치슨은 "만약 이 방어선 바깥에서 어떤 분쟁이 발생한다면, 피해자는 유엔 헌장에 의거한 전체 문명 세계의 헌신(commitment)에 의지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 발언은 일루미나티의 아젠다에서 한국 전쟁이 맡을 역할과 밀접하다. 일루미나티는 사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세계 지배를 노린다. 바이블은 "적그리스도(Antichrist)" 또는 "짐승(Beast)"이 모든 민족, 사람, 언어, 국가를 지배할 것이라고 계시하고 있다. (계시록 13:7).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선 세계 정부가 필요하다. 이것은 자명하다. 명백하게 예언적인 시온의 장로들의 의정서는 세계 정부를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의정서 5장 11절은 "그들의 카르텔이 점진적으로 모든 국가를 흡수할 것이며 수퍼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CFR에 의해 창조된 유엔
미국에서 점진적 세계 정부의 수립 임무는 1921년 설립된 CFR에게 맡겨졌다. CFR은 미국의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 가입을 결정한 1920년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상원의 거부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 연맹이 실패한 후 그 승계자는 당연히 유엔이었다. 유엔 설립 계획은 비밀히 국무부를 장악한 CFR 회원들에 의해 구상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공식 아젠다 그룹"으로 불렀으며, 이 거슬리지 않게 들리는 이름은 그들의 계획에 대한 의회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신중하게 선정되었다.
1.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 : 1차 대전이 끝난 1920년 일루미나티들이 주도한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일루미나티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만든 세계 정부의 최초 모델 비엔나 의회를 러시아의 짜르가 무산시켰기 때문에, 최대 장애물인 짜르를 없애는 글로벌 엘리트들의 계획이 볼셰비키 혁명이다.
2. 베르사이유 조약 : 파리 평화 조약 5개 항목 중 하나이며, 독일 식민지들을 영국과 프랑스에게 할당하는 것과 독일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리는 것이었다. 독일을 파산시키기 의하여 존 포스터 덜레스와 알렌 덜레스 형제가 주도한 이 조약은 독일로 하여금 2번째 전쟁을 시작하게끔 유도하기 위하여 고의로 기획되었으며, 독일을 선동하기 위해서 히틀러가 심어졌다. 히틀러가 러시아를 공격한다면, 러시아와 독일 양국을 모두 파산시킬 수 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유엔 창립 총회가 열렸을 때, 미국 대표 대부분인 47명은 CFR 회원이었다. 후일 소련의 스파이로 판명된 앨저 히스(Alger Hiss)가 이 총회의 총장이었다. 이 때 상원은 국제 연맹과 마찬가지로 유엔을 거부할 것이었기 때문에, 일루미나티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히스는 잠겨진 금고에 담긴 유엔 헌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대표단의 재잘스러운 확담 후에, 유엔 헌장은 상원의 인준을 받았다. 당시 유엔 부지 구입비 850만 달러를 기부한 건 존 D. 록펠러였고, 오랬동안 회장을 지낸 그의 동생 데이비드는 CFR의 명예 회장이었다. (록펠러는 모스크바 공항에 자유롭게 내릴 수 있는 몇 안되는 미국인이었다).
유엔의 존재 가치 입증
일단 유엔이 설립되자, 그 다음 단계는 유엔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평화 유지자로써의 유엔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유엔 헌장에 적혀있는 그 존재의 첫번째 목적은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였기 때문이다. 이 각본을 위해 필요했던 것이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거의 2년이 지난 1952년 4월, 아들라이 스티븐슨은 다시 CFR 계간지 〈Foreign Affairs〉에 "한국의 전망"이라는 글을 썼다.
"내 주장의 요지는 생존 가능한 집단적 안보 시스템 수립을 향한 역사적 진전을 한국에서 이루어냈다는 우리의 경험적 의미에 기반하고 있다."
"집단 안보"라는 문구는 위선이다. 한국 전쟁 기간 중 유엔군의 90%는 미군이었다. 비록 15개의 다른 국가들이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수치로 말하면 상징적인 극히 작은 것이었다. 국제 연맹에 대한 의회의 반대는 대부분 이 초국가 정부가 미국의 주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유엔의 행동은 그 동안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시온의 장로들의 의정서 10장은 다음과 같이 계시한다.
"우리는 조만간 대통령의 책임을 분명히 할 것이다. 우리는 선전 포고의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만들 것이다."
한 명의 대통령을 조종하는 것은 분명 전체 입법권자를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미국 헌법은 전쟁 선포의 권한을 의회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권한을 어떻게 훔칠 수 있을까? 1944년 CFR은 다음과 같은 국무부 메모를 준비했다.
"우리의 어려움은 오로지 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에 있다. 이 문제는 국제 조약이 이 장애물을 넘을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듬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치안 활동으로써의 우리의 참여가 국제 안보 기구에 의해서 장려될 수 있으며, 반드시 전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상원은 유엔 헌장을 인준함으로써 전쟁 선포라는 스스로의 권한을 효과적으로 포기했으며, 그 이후에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트루만 대통령은 의회 자문을 구하지 않고 한국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7월 29일 기자 간담회에서 트루만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치안 활동입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10만명을 잃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치안 활동이었다. 그의 발언은 확실히 오웰리안적 의미의 권력(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에 대한 증명이다.
세계 정부를 위한 제물
한국전의 승리는 양측 모두에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화 유지자로써의 유엔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세계 정부의 제단위에서 민간인 포함 3백만이 목숨을 바쳤다. 1953년, 전쟁이 끝났을 때 남북 경계는 처음 시작할 때 그 위치 38선 그대로였다. 한국 전쟁은 유엔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James Perloff, The Korean War: Another Conflict that Served the Illuminati Agenda
38선과 국무부
(나치 패망 이후의 세계 정세를 논의했던 얄타 회담에서 처칠과 루스벨트의 초정을 수락한 스탈린은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다. 붉은 군대는 일본 관동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빠른 속도로 남하하고 있었다).
38선은 미 국무부와 국방성이 일제 항복 후 일제가 강점하고 있던 한국의 지배 방법을 두고 소련과의 협상을 준비하고 있었던 2차 대전의 마지막 시점에 기원하고 있다. 국무부의 두 대령 딘 러스크(Dean Rusk)와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은 미국과 소련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통제선을 구획하는 임무를 맡았다.
시간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 직후였고, 한반도에 가장 가까이 배치되어 있는 미군 기지가 6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던 오키나와에 있었기 때문에, 한반도 기지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있던 미국 관리들은 그들이 미군을 한반도에 주둔시키기 전에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려 달려들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물론 딘 러스크는 지난 천년 이상 통일을 이루고 있던 한국에게 38선은 경제적으로나 지리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는 냉전중이었다. "군사적 편의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물론 분단은 임시적이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1991년, 딘 러스크는 그의 자서전 "As I Saw It"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항복 후 열린 대책 회의 도중에 회의장을 빠져 나온 본스틸과 나는 근처의 한 방에서 한반도 지도를 쳐다 보면서 쉬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점령 지역을 선정해야 하는 엄청난 임무가 주어졌다.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던 우리의 마음은 무척 조급해졌다. 둘 다 한반도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수도 서울이 미국의 영역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광대한 지역의 점령은 육군이 반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펼쳐 놓고, 서울 북쪽 어딘가에 선을 긋기에 편리한 지점이 있는지 살펴 보았다. 하지만 (산맥이나 하천과 같은) 자연스러운 지리적 분단선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우리의 눈에는 38선이 보였고, 이 선을 추천하기로 했다. 수뇌부는 별다른 입씨름없이 곧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놀라웁게도 소비에트도 이 선을 받아들였다."
때문에 한국은 분단되었다. 두 점령 지역을 통일하려는 초기의 노력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리고 3년후 1948년 늦여름(남한 8.15와 북한 9.9) 한반도에는 서로 독립적이고 극히 적대적인 2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Michael Fry, Korea and 38th Parallel : How a National Geographic map helped divide Korea
히로시마 & 나가사키
일본의 항복 이유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때문이라는 설명은 거짓말이다. 원폭 투하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2차 대전에 대한 가장 큰 역사 왜곡 중의 하나이다. 많은 외국인들은 원폭 투하는 불필요한 일이었으며 정당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고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 특히 장년층-노년층들은 아직도 이 엉터리 신화를 믿고 있다. 원폭 투하가 미군들의 생명 뿐만 아니라 수백만 일본인들의 생명까지 구한 인도주의적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편리한 망상에 아직도 깊이 사로잡혀 있다.
트루먼 대통령과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허위 정보들을 고의적으로 선동했다. 트루먼은 그의 자서전에서 원자 폭탄이 미군 50만을 구했다고 말한다. 조지 H. W. 부쉬는 이 숫자를 다시 1백만으로 올린다. 그러나 사실은 원자 폭탄이 미군의 생명을 구한 것도 아니며, 일본의 항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도 아니라는 것에 있다.
1946년 전쟁부 보고서는 일본의 항복이 원폭과는 관계가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놀라웁게도 최근 워싱턴 소재 미해군 국립 박물관의 공식 입장은 이렇다. "원자탄 투하로 인해 발생한 거대한 파괴는 13만 5천의 희생을 가져왔지만, 일본군 전력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미국의 전략가들로 하여금 원자 폭탄 사용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 것은 소련의 만주 침략이다."
당시 오성 장군 7명 중 6명이 원폭 투하가 "군사적으로 불필요"하거나 또는 "윤리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일" 또는 "그 둘 다"라고 했던 것을 아는 미국인들은 거의 없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참모총장 윌리엄 리히(William Leahy)는 이렇게 말했었다. "원자 폭탄 투하는 여태껏 들어본 그 어떤 기독교 윤리와 그 어떤 전쟁의 규칙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일본은 이미 패배하고 있었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야만적 무기의 사용은 일본과의 전쟁에 실질적 도움을 주지 못했다. 원자 폭탄을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중세 암흑 시대 야만인들의 윤리 규범을 도입하게 되었다."
아이젠하워는 일본이 이미 패배했음을 인정하고 있었고, 맥아더는 미국이 일황을 지켜준다는 약속만 했었더라면, 일본은 최소한 수개월 전에 항복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항복하지 못하도록 고의로 일황의 안전 보장에 대한 약속을 하여주지 않았고, 원자탄이 개발될 때까지 전쟁을 질질 끌었다. 일본이 전후에도 계속된 조선의 강점 지배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 것도 원인 중의 하나이다). 1945년, 일본 지도자 대부분은 승리가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1945년 2월, 전 총리 후미마로 고노에 왕자는 히로히토에게 이렇게 썼다. "송구스럽지만 일본의 패배는 불가피합니다."
암호 해독에 성공한 미국은 이미 일본의 모든 통신들을 감청하고 있었고, 미국이 더 이상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전쟁을 끝내려는 일본의 의도가 절박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일본 도시들은 이미 연합군의 폭격을 받고 있었고, 철도는 모두 파괴되었으며, 식량 공급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트루만 스스로 7월 18일 감청한 일본 통신문을 인용하기도 했다. "일황이 보낸 전보들을 보면, 일본은 평화를 요구한다는 것들이 적혀 있습니다."
미국 지도자들은 일본이 소련의 침공 가능성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물론 미국은 이것을 막을 전략이 없었다. 일본의 마음을 바꾼 것은 소련의 만주 진입이다. 1945년 4월 11일, 합동 참모 본부 정보부장은 "언제라도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들어온다면, 일본의 패배는 명확하다"는 것을 모든 일본이 깨닫게 될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1945년 5월, 최고 전쟁 위원회(Supreme War Council)는 이렇게 발표했다. "만약 소련이 이 전쟁에 들어온다면, 그것은 제국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다." 그 이후로 이 발언은 일본의 지배 계급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모르고 있던 것은, 소련이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이유가 영국과 미국의 초대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1945년 2월, "빅3" 얄타 회담에서 처칠과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나치가 패망하면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주문했고, 스탈린은 동의했다.
트루먼 쇼
같은 해 1945년 7월 중순, 나치 패망 직후 개최된 포츠담 회담에서 처칠과 트루먼은 태평양 전쟁 참여에 동의하는 스탈린의 확언을 받았다. 기쁨에 찬 트루먼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쪽바리들은 이제 끝이다!" ("Fini Japs when that comes about.") 다음 날 트루먼은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이제 우리는 1년 일찍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죽지 않아도 되는 우리 젊은이들을 생각해 보세요."
회담 도중 맨하탄 프로젝트의 원폭 실험 성공을 보고받은 트루먼은, 소련을 원폭으로 겁박하려는 계획을 꾸미고 스탈린을 꼬드겼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150척 분량의 탱크, 트럭, 총기, 탄약 등의 병참 지원을 약속하는 끈질김 때문에, 그리고 일본의 절반을 먹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에, 참여를 결정했다. Read In 1945, the US Secretly Handed 150 Warships to Russia for an Invasion of Japan
원폭 투하 없이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요구를 철회하고 일본이 그들의 황제를 지킬 수 있다고 알려 주는 것이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 대부분도 전후 체제의 안정에는 히로히토가 열쇠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원자탄 실험 성공을 기다리며 전쟁을 질질 끌었다. 두번째는, 소비에트의 침공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1945년 8월 8일 시작되었다.
결정타는 원자탄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공격이다. 소련의 공격은 일본의 Ketsu-go 작전("Operation Codename Decisive")을 철저히 파괴했다. 강력한 붉은 군대는 관동군을 신속하게 파괴했다. 항복을 서두른 이유에 대해 간타로 스즈키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일본이 지체했더라면, 소련이 만주, 한국, 카라후토 뿐만 아니라 홋카이도까지 가져갔을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근본을 파괴할 것이다. 우리가 미국과 협상할 수 있을 때,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
태평양 전쟁의 공식을 바꾼 것은 소련의 공격이다. 무시무시하기는 했지만 원자탄 때문은 아니었다. 미군은 이미 수개월 동안 일본을 폭격하고 있었다. 유키 다나카가 보여주었듯이, 미군은 일본 도시 100군데 이상을 폭격했다. 토야마는 99.5%가 파괴되었다. 일본 지도자들은 원폭이 아니었더라도 미국은 일본을 완전 파괴할 수 있었다고 인정했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단지 앞으로 파괴되어야 할 2개의 도시일 뿐이었다.
Message to Moscow
그러나 소련의 공격은 미국과 일본의 지도자들이 기대했던 것 만큼이나 파괴적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전후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그들의 계획(유엔, 유럽 연합, NATO, IMF, IBRD, WTO, WHO 등 세계 정부 수립을 위한 국제 기구들의 창설, 브레튼 우즈 조약에 의한 기축 통화 달러 구축, 한국 전쟁 등)에 만약 소련이 간섭한다면, 미국의 무기고에 성능 좋은 폭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경고로 활용하기 위해서 원자탄 사용을 원했다. 스탈린과 크레믈린은 원폭 투하를 그렇게 해석했다. 미국의 원자탄은 일본 지도자들에게 감흥을 주는 대신 오히려 크레믈린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그것이 냉전으로 도약하는 주요인이었음이 증명되었다.
이 폭탄은 인류를 멸종으로 몰고 있다. 트루만은 이 행성의 생명들을 모두 종말시킬 수 있는 최소 3개의 프로세스를 시작했고, 무자비하게 끌고 나갔다. 포츠담 회담에 참석중이던 트루먼은, 7월 16일 뉴멕시코주 폭발 실험의 강력함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시무시한 폭탄을 발명했다."
이것은 아마도 유프라테스 계곡 시대 노아와 유명한 그의 방주에서 계시된 "불에 의한 파괴"일 수도 있다. 핵폭탄은 종전에 기여한 바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오늘날까지도 인류를 멸종으로 위협하는 프로세스를 시작했다. 무고한 시민들을 살해하는 것은 당연히 범죄이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멸종 위협은 그보다 더 큰 범죄이다.
미국이 베트남에게 전쟁을 건 이유는?
2차 대전에 사용된 폭탄 숫자보다 3배 이상 많은 폭탄이 이 조그만 나라에 쏟아졌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잔혹한 범죄이다. 살충제 1천 9백만 갤런이 뿌려졌다. 베트남의 아름다운 숲은 효과적으로 제거되었다. 미국은 총 15,000부락 중 9,000부락 이상을 파괴했다. 북베트남의 공업 도시 6군데도 파괴했다. 총 30개 현 중에서 28곳을 파괴했고, 116개 군 중에서 96곳을 파괴했다.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는 베트남인 3백 8십만이 사망했다고 말한다.
핵무기 사용에 대한 위협도 여러 차례 있었다. 핵무기 사용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헨리 키신저이다. 이 전쟁은 정말로 끔찍했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 범죄에 대해 속죄받지 못했다. 키신저는 노벨 평화상 수상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대가로 헤이그 재판소에 섰어야 했다.
우리는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잘못된 편이다. 미국은 처음에는 식민지 주민들의 독립 투쟁을 진압하는 프랑스의 전쟁 자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했지만, 프랑스가 패하자 전쟁을 이어받았다. 케네디는 군사 고문단(advisers) 16,000명을 보냈지만, 이 전쟁이 잘못되었음을 금방 깨달았다. 만약 그가 살해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전쟁은 금방 끝났을 것이다.
이 전쟁에 대한 미국의 동기는 여러 가지가 혼합된 것이다. 호치민은 국가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에게 패하길 원하는 미국인은 없을 것이다. 1949년, 중국의 공산 혁명이 성공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도미노 효과를 두려워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된다면, 그 여파는 동남 아시아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것은 일본을 고립시킬 것이고, 결국 일본은 교역 상대를 찾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 블록으로 돌아서게 된다. 월남전 동기 중의 하나는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이었다.
또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이다. 미국은 값싼 노동 시장과 천연 자원 그리고 인도차이나 시장을 잃고 싶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는 전쟁으로부터 점점 살이 찌고 번영하게 되는 군산 복합체의 이해 관계이다. 전쟁은 그들의 존재 이유이며, 전쟁으로부터 두둑한 이윤과 진급을 얻게 된다.
미국이 세계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서는 전쟁이 있어야 한다. 경제적 이해 관계를 방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월남전의 동기는 미국의 헤게모니 유지와 경제적 이해 관계 그리고 왜곡되고 타락한 반공산주의 정서가 복합된 여러 가지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냉전의 진짜 이유
1948년, 봉쇄 이론(Containment theory)의 논리적 근거를 제공했던 국무부 관리 조지 케난(George Kennan)은 그의 메모에서 냉전 배후에 있던 경제적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세계 부의 50% 이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구는 6.3% 밖에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질투와 분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가올 미래에서 진정한 우리의 과제는 이러한 불균형의 유지를 허용하는 관계의 패턴을 고안해 내는 것이다."
미국은 이것을 추구했다. 이 전략은 잔인한 독재 정권에 대한 지원을 필요로 한다. 물론 때로는 민주 정권을 지원할 때도 있다. 이 싸움은 정치, 경제, 사상 뿐만 아니라 문화의 영역에서도 일어난다. 1941년, 〈타임〉과 〈라이프〉 발행인 헨리 루스(Henry Luce)는 이렇게 말했었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 미국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미국은 그렇게 되도록 설정되어졌다."
유럽으로부터 두 차례의 침공(나폴레옹과 히틀러)을 받은 러시아는 독일과 그들 사이의 완충 지대를 원한다. 물론 미국은 그들의 경제적 침투를 제한하는 그러한 정치 경제적 영역을 반대한다. 미국과 러시아는 직접적인 전쟁을 벌인 적은 없지만, 매우 위험한 대리전을 수없이 치르고 있다. 이렇게 암울한 시대를 버텨내는 우리 인류는 매우 운이 좋은 것이다.
Peter Kuznick and Edu Montesanti, The Untold History of US War Crimes
"얄타 회담에서 합의된 것은, ①소련 극동군의 원정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차량, 물자를 미국이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소련은 유럽에서의 종전 2~3개월 후에 연합군 편에서 태평양 전쟁에 참여한다. ②일본이 가져간 사할린 남부와 인근 도서의 반환을 포함하여 1904년 일본의 배신적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권한을 회복한다. ③쿠릴 열도를 소련에게 넘긴다 등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의 선제 공격으로 패한 "러일 전쟁" 이후 체결되었던 1905 포츠머스 조약(Portsmouth Treaty)에 의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싶어했다. 물론 일본이 과거 "러일 전쟁"을 승리한 배경에는 앵글로 아메리칸의 지원이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만주 진입은 침략이 아니다. 영국, 미국과의 합의 하에 일본 관동군을 제거하기 위해 진입한 것이다. 오히려 앵글로 아메리칸 제국은 2차 대전 이후 냉전을 창출하기 위해서 한반도 분단과 중국의 공산화를 원했다. 냉전은 미국이 이끄는 소위 "자유 진영"이 정이 되고, 소련과 중국이 이끄는 "공산 진영"을 반으로 만드는 정반합 작전이었다. 그래야만 정과 반의 "문명의 충돌"을 연출할 수 있다.
2차 대전 말미 나치와의 전쟁에서 소련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유럽 해방의 공을 소련이 차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서구의 과두지배자들에게는 미국이 유럽을 해방한 것처럼 세상을 속이는 이벤트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나치의 전력 배치가 가장 느슨한 곳을 골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기획되었고, 그 다음 언론의 융단 폭격을 통해 실제 2차 대전의 승리에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이 작전이 마치 유럽 해방의 결정적 요인인 것처럼 기정사실화되었다.
이 수법은 미국이 한반도를 해방한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 기획되었던 인천 상륙 작전에서도 다시 사용되었다. 전쟁의 책임이 패전국들에게 있다는 것을 속이기 위해서, 미국이 악마로부터 세상을 구원한 구세주 메시아라고 세뇌하기 위해서, 그리고 인류는 유럽과 아시아를 해방한 미국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위한 목적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진주만〉, 〈인천 상륙 작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1차 세계 대전〉과 〈2차 세계 대전〉 등 속임수 영화와 다큐멘타리들이 지금도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나치 패망과 유럽 해방의 공은 소련에게 있었다. 나치를 무너뜨린 것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이다. 베를린을 함락한 것도 소련이다. 때문에 미국은 독일의 분할 통치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고, 독일에 집중한 투자의 절반을 소련에게 넘겨야 하는 낭패를 겪게 되었다. 문제는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일본 경제도 씨티 오브 런던과 월 스트리트에 의해 비밀리에 육성되었다는 것에 있었다. 아시아에서 부렸던 일본의 난동은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도운 앵글로 아메리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본을 앞세워 시베리아 철도를 부수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워싱턴의 전후 계획은 일본을 통해서 아시아를 대리 지배하는 것이다. 일제가 소련에게 항복하는 것을 막아야 했다. 일제는 미주리 전함에서 항복해야 했다. 전범국 일본도 독일처럼 분할 통치를 받아야 했지만, 독일을 소련과 나눠야 했던 낭패를 일본에서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미국은 대신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스탈린이 미국의 38선 제안을 수용한 이유는 버섯 구름을 보고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자탄 투하의 진짜 목적은 "일본의 항복"이 아니라 "거기서 멈춰!"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