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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을 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 / 화장을 권장하는 이유 ?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3-11-12 19:25:39
추천수 43
조회수   4,403

제목

자살을 하면, 절대로 안 되는 이유 / 화장을 권장하는 이유 ?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Related Link: http://cafe.naver.com/occultmulder/27802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이 상위 차원에서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준비를 한다.



그런 세심한 준비와 인내가 있었기 때문에 인간이 육체적 차원의 삶을 영위한다.



영혼은 다양한 차원에서 존재의 경험을 함으로써 자신의 완성을 도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화된 생물일수록 그 만큼 준비 기간이 길고 복잡하다.







영혼이 육체적 삶을 통해서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멘탈 차원에서 멘탈체를 구성해야 하고



다시 아스트랄 차원에서 아스트랄체를 구성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에텔체를 구성해야 한다.



그런 다음 최종적으로 육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각 차원의 매체들을 간단히 만드는 것도 아니다.



멘탈 차원에서 다음 생에 쓰일 멘탈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멘탈 차원에서 멘탈 질료들을 다루는 각종 데바들과 협력해야 하고 그들을 선별해야 한다.







다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아스트랄 차원에서 활동하는 각종 등급의 아스트랄 데바들과 협력해서



아스트랄 질료들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끌어모아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에텔 차원에서는 육체의 거푸집 역할을 할 틀을 만들기 위해서



각종 변수들이 적용되어서 일정한 형상을 취하게 된다.



거기에는 다양한 차원의 카르마가 적용되어서 펼쳐지게 된다.







그렇다고 이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기에 합당한 시기와 장소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인간의 운명을 읽는 데 있어서 각종 점성학이 의미있는 까닭이다.



최종적으로 합당한 육체를 제공할 수 있는 가족을 찾아야 하는데



거기에는 과거의 긴 시간 동안의 카르마가 작용한다.



가족을 선택할 때는 자신과 관계있는 민족, 국가가 선택되어야 하고



특정한 가족과의 카르마적인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영혼은 헤아릴 수 없는 과거의 축적된 정보와 각종 등급의 영적 존재들과 의논하면서 한 생을 준비한다.



그렇게 해서 힘들게 수정된 태아에 한 영혼의 손길이 미치는 것이다.



태어나서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의 유년, 소년, 청소년 기간을 거치면서



영혼은 본격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인내하면서 기다리고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스무 살 즈음이 되면



비로소 전생에 끝냈던 삶의 수준 그대로 새로운 육체적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을 한다는 것은 일단 영혼이 의도한 계획을 무시하는 것이고



기나긴 준비과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고



그 말은 다시 새롭게 힘든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느 것 하나도 그냥 건너갈 수 없는 것이 영혼의 법칙이기 때문에



못다 한 삶을 다시 어느 시간대에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만큼 진화가 지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로 인해 부정적인 카르마가 더 생기게 되고



그 결과 다음 생의 육체적 삶이 더욱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 때나 상위 차원에서 육체적 차원으로 들어올 수 없듯이



아무 때나 육체적 차원에서 벗어나서 상위 차원으로 갈 수 없다.



그 말은 때로는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을



육체적 차원과 아스트랄 차원 경계에서 방황하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육체적 삶을 시작했다는 것은 그렇게 심오하고도 진지한 의도와 배려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견딜 수 없는 삶을 설계할 정도로 영혼은 어리석지 않다.



언제나 최상의 삶을 계획했고 만들어가는 것이 영혼이기 때문에



그 영혼의 계획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출처~ http://cafe.naver.com/occultmulder/27802

작성자 루치아노





--- 영혼의 존재를 믿지 못할지라도,,

자살하면 안되는 이유를,, 아주 상세히 써놓았군요..





누군가는... 영혼의 참자아 (Atman 아트만 치솔) 를 찾았고,



누군가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못할지라도





전설의 고향이나 구신이야기내지,, 구신영화를 즐겨본다 ^^





최**, 조 ** ...........



아무리 힘들더라도, 아무리 힘든 상황이 오더라도,,

극단적 선택은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윗 글대로,, 정말로 저러면 어찌할꺼나~~~





어느 것 하나도 그냥 건너갈 수 없는 것이 영혼의 법칙이기 때문에

못다 한 삶을 다시 어느 시간대에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그 만큼 진화가 지연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로 인해 부정적인 카르마가 더 생기게 되고



그 결과

다음 생의 육체적 삶이 더욱 고통스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신지학적 관점에서 본 죽음의 과정







일반적인 의미에서 죽음은 육체와 에텔체의 분리부터 시작된다.



(갑작스런 교통사고, 전쟁 중의 폭격, 혹은 화재 같은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는 경우를 제외하고)



명심할 것은 에텔체의 분리 이전에 영혼에 의해서 죽음의 신호가 내려지고



호르몬에서 육체에 치명적인 독성물질이 분비됨으로써 육체의 죽음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영혼의 결정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어떤 죽음도 없다. (반면에 자살은



영혼의 지시와 무관하게 하위 인성자아의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대가가 크다.)







영혼의 지시에 의해서 시작된 죽음의 과정은 육체의 급격한 부패를 초래하는데



에텔체가 분리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말 그대로 흙에서 온 것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종종 공동묘지나 갓 매장한 무덤 근처에서 목격되는 유령은 보통 에텔체를 우연히 목격하는 것이다.







에텔체는 잠시 동안 육체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다가 그 역시 해체되기 시작한다.



살아 있을 때 육체적 삶에 대한 집착이 큰 사람들의 에텔체는 그 존속 기간이 길다.



에텔체는 빨리 해체될수록 좋다. 화장을 권장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매장이 안 좋은 이유 중의 하나는



사자의 에텔체가 오래도록 시체 주위를 맴돌면서 육체적 오염물질을 번식시키기 때문이다.



환자가 중병으로 죽은 경우에 안 좋은 병적 기운이 그대로 에텔체에 남아있기 때문에



토양을 오염시키고 주변의 기운을 오염시킨다.



불은 잔존하는 에텔체를 빠른 시간 안에 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죽은 자의 의식은 에텔체를 벗어버리고서 아스트랄체와 멘탈체만을 남겨놓게 된다.



아스트랄체의 경험은 보통 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의 경험”을 선사한다.



인간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되면서



건전하고 긍정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은



각종 종교에서 묘사하고 있는 저승세계를 경험한다.







그러나 아스트랄체로 경험하는 욕망의 세계는 온갖 미혹과 망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역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살아서 고통스런 감정과 낮은 차원의 욕망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은



역시 그에 상응하는 아스트랄 세계의 경험을 한다.



폭력적이고 사악한 사람들의 아스트랄 차원의 경험은 말 그대로 육체적인 삶의 복사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아스트랄 차원에서 저승세계에서 보내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낸다.



아스트랄체도 곧 해체되어야 하는 덧없는 매체로서



의식은 아스트랄체에서 벗어나서 멘탈체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의식으로부터 이탈된 아스트랄체는 잠시 동안 존재하다가 다른 매체들처럼 역시 해체된다.



간혹 욕망이 강하거나 충족되지 않아서 오래도록 남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아스랄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그 만큼 긴 시간 동안 진화의 시기가 늦춰지게 된다.







멘탈체에 의식의 초점이 맞추어진 사자의 의식은 전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한다.



현재의 인류 대다수는 죽음의 과정중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멘탈차원을 경험하기 때문에



별로 활동적이지 않은 멘탈체에 남겨진 의식은 대부분 무의식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멘탈체로 경험하는 세상은 아스트랄체로 경험했던 세상에 비하면 상상을 초월한다.



살아 생전에 지적 능력이 탁월하게 발달된 사람들이 그런 멘탈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영혼은 멘탈체에 머물지 않고 다시 멘탈체마저 벗어버린다.



그러면 남는 것은 원인체 혹은 코잘체인데 그야말로 영혼의 집이다.



현재 인류의 대다수는 코잘체가 있는지조차 모른다.



그냥 잠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순식간에 그것도 무의식적으로 코잘체에 의식의 초점을 모으다가 어느 새 다음 생을 계획한다.



그렇게 해서 죽음의 모든 과정이 끝난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고



고도로 영적 능력이 발달된 사람들의 죽음은 그와 상당히 다른 과정을 겪는다.











http://cafe.naver.com/occultmulder/27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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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죽음과 깨달음의 의미







현대의 수많은 구도자들에게 있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영적 전통을 거론하라 하면



흔히 티벳불교를 지목한다.



티벳불교에 있어서 가장 특징적인 사상을 찾는다면 죽음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와 관심이다.







티벳불교를 다른 불교와 구분짓는 중요한 요소는 아무래도 금강승 즉 밀교적 요소일 것이다.



각종 밀교적 수행의 원리를 보면



거기에도 죽음에 적용되는 원리적 설명이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생성과 소멸의 원리다.







밀교적 수행을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누면 생기차제와 원만차제로 나누는데



생기차제는 청정한 본존불의 현현이고



원만차제는 생기한 본존불의 해체라고 할 수 있다.







밀교적 수행을 보면 마치 죽음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연상하게 된다.



사실상 큰 깨달음은 그 만큼의 큰 죽음을 의미한다.



해탈이 삼계로부터 벗어나서 더 이상 삼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면



깨달음 그 자체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신지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죽음과 깨달음도 티벳불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죽음의 과정이 어떤 성질의 것인가를 보면 그 사람의 영적 깨달음의 정도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깨달음의 정도는 어떤 종류의 죽음을 경험하느냐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 집착이 과도한 사람의 경우에는



죽음의 징후가 시작될 무렵부터 육체적 삶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서 심각한 고통과 절망을 경험한다.



그런 사람의 육체적 죽음의 과정은 매우 길게 이어지면서



육체를 벗어나기 싫어서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육체와 분리된 에텔체 역시 영적으로 진보된 사람에 비해서 긴 시간 동안 존속한다.



심지어 극도의 물질적 집착과 욕구가 강한 사람의 경우



살아 생전에 아꼈던 재물이나 집에 에텔체가 머물면서 어떻게든 지속하려고 애쓴다.



그런 사람은 아스트랄 차원으로 제대로 가지도 못하고



그냥 다시 육체적 차원 변두리에 머물면서 헤매든가 곧 육체적 차원으로 다시 윤회하게 된다.







육체적 만족보다는 좀 더 수준 높은 생활, 즉 감정적 만족과 기쁨을 더 추구했던 사람들은



일정한 시간이 경과되면 자연스럽게 아스트랄 차원으로 들어간다.



아니, 들어간다고 하기보다는 의식의 초점이 그 차원에 맞추어진다.



대다수의 대중들의 삶과 죽음이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아스트랄 차원의 경험에 만족하고 집착한다.



온갖 감정적 변화를 경험하면서 욕구하는 대로 펼쳐지는 세계에 황홀해하면서 즐거워한다.



백 명이 있다면 백 가지 아스트랄 세계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마다의 욕구로 창조된 세계에 갇혀서 그 욕구가 해소될 때까지 그 안에서 지내게 된다.







누구는 고도로 순화된 감정적 충일감 속에서 지내겠지만



누구는 온갖 희노애락을 모두 겪으면서



지상세계에서 보냈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마치 지옥이나 아귀계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극도의 부정적인 감정적 경험들 속에서 정신없을 것이다.



폭력적이고 거친 감정적 경험이 소용돌이치는 한 가운데서 자신의 업에 따라 정신없이 휘둘릴 것이다.







불교에서 번뇌를 없앤다고 할 때는



바로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경험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도로 영적 의식이 발달된 사람은



이미 육체적 죽음을 맞이할 때부터 순식간에 아스트랄체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아스트랄체는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극히 희미한 정도로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아스트랄 차원을 경험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번뇌가 없는 것이다.







현재의 대다수 인류는 멘탈체가 본격적으로 발달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아스트랄 차원의 경험이 죽음의 핵심적 부분을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사후세계에 대해 보고하는 장면들을 보면 십중팔구 아스트랄 차원에 대한 경험이다.



멘탈 차원의 경험을 보고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설사 보고했다고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한 경험은 직접적으로 보고된 적이 없다.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에텔체, 아스트랄체, 멘탈체가 빨리 해체될수록



그만큼 영적 진화가 많이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말은 그 사람의 의식이 그 세 개의 체들에 대해서 탁월한 이해를 하고 있고



통제력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적 경험과 감정적 경험, 그리고 지성적 경험 모두가 덧없는 허구일 뿐



진실로 실재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영적 본질을 은폐하는 것들임을 충분히 자각한 사람은



죽음의 과정에서도 일반 사람들이 겪는 경험들을 하지 않고서 바로 영혼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깨달음은 육체적 생활 속에서보다는 육체를 벗어났을 때 비로소 진면목을 발휘한다.



자신의 삶이 자신의 의식의 수준을 나타낸다.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의식의 수준을 나타낸다.







http://cafe.naver.com/occultmulder/28011

[출처] (신지학) 죽음의 의미와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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