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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 받은 女 자 - 막달라 마리아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3-01-20 17:26:53
추천수 44
조회수   1,613

제목

축복 받은 女 자 - 막달라 마리아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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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Y MAGDALENE 막달라 마리아, 메리 맥달레인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여성의 이름으로 마태복음 27:56, 27:61, 28:01 마가목음 15:40, 15:47, 16:01, 16:09, 24:10 요한복음 19:25, 20:01, 20:18 에 '막달라 마리아'로 누가복음 08:02 에는 '막달라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막달라'는 이스라엘의 소도시 이름으로 통상 이름앞에 붙혀서 출신지를 나타내고 동명이인을 구별하기도 한다.







오래전 부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추측과 오해가 많았는데 근래에 그녀를 '예수그리스도의 아내'로 그린 소설이나 영화가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1999년에 미국 아리조나주 세도나에 위치한 'Spiritis Publishing' 출판사에서 "Love Without End' 라는 제목으로 '글렌다 그린'이라는 여류 화가가 예수그리스도를 현존으로 만나 "LAMBLION" 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그리고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된 경위를 책으로 출간하고 2007년에 증보판을 내었는데 이 증보판에 실린 내용중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내용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였나요?"



"그녀는 내가 내 사도들 사이에 특별한 자리를 준 비상한 한 여자였소. 그건 다른 하나의 특별한 (RADICAL)선택이었소. 내가 그렇게된 사연을 말 해 주리다. 마리아는 나보다 대략 10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여자였소.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미망인(과부)이었소. 그녀의 남편 가문에는 그녀가 재혼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무도 없었소. 당시의 관례는 그랬더랬소. 그리고 그녀는 건강한 아이를 임신할 수 있는 나이가 지났었었소.



그녀는 로마군과의 소규모 충돌로 죽은 두 아들과 사라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딸이 하나 있었소. 사라는 그녀의 어머니를 아주 빼 닮았었소. 나와 마리아와의 깊은 우정으로 볼 때 마치 그녀는 나의 양녀와 같았지요. 사라는 나의 혈통이라고 잘못 전해져 온 많은 구전들의 어머니이지요.



마리아는 당시 막달라에서 상당한 남편의 유산을 물려받았었소. 그녀는 두 여동생이 있었는데 , 그 중 하나는 친밀히 지내는 많은 여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살고 있었지요.



내가 마리아를 그녀와 함께한 여인들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나는 그녀가 잃은 많은 것들로 인해 그녀가 큰 충격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더구나 정서적인 질환과 함께 심신이 심각한 탈진 상태였었소.



나는 그녀의 영혼과 육신의 질병을 치유했소.



그때 우리는 이 만남이 예정된 숙명이라는 것을 알았소.



그녀는 끝까지 나와 함께 했소.



그녀의 생은 아주 특별한 목적에 맞추어져 있었소.



근세의 많은 소설과 낭만적 고찰에 반하여 그녀는 나의 아내도 연인도 아니었소.



우리 사이에는 그녀의 성실과 품위를 해칠 만 한 아무일도 없었고



여러번 상냥함과 감동적인 공급과 지원으로 아내가 없는 빈자리를 채워 주었고 그녀의 딸 사라는 나의 한결같은 기쁨이었고, 나에게 어린이 안에 있는 특별한 역량과 의식에 대한 이해를 증진할 기회를 주었소.



마리아는 빛나는("brillant") 여인이었고, 더구나 자연의 선물에 대한 정보와 식견이 있었소.



그녀는 당시 학자였던 그녀의 남편으로 부터 받은 이례적인 선물로 복을 받은 여인이었소.



그 당시 여자들은 배움으로 부터 멀었고,성경 읽기도 금지되어 있었소.



그러나 그녀의 남편은 비밀히 모든것을 함께 공유했고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었을 뿐만아니라 남자들의 지식을 능가하는 여자였소.



그리고 그녀의 남편과 함께 이집트를 여행하며 역사와 당시의 문물들을 공부했소.



마리아는 그녀의 소임을 감당하도록 아주 잘 준비 된 여자였소.



그녀는 동등한 지혜로 남자들과 나란히 했고 그녀의 빛이 다른이들에게 닿았었소.



더구나 그녀는 치유에 대한 자연적 재능과 약초와 향료 , 향유에 대한 잘 교육받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소.



나를 따르는 이들과 나에게 베푼 그녀의 커다란 선물은 그녀의 인정깊은 심성과 그 힘든 공포를 잘 견뎌 넘게 한 , 힘들었던 지난 과거경험들에서 얻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일게요.



십자가 희생 전 후의 날들에 있어서의 그녀의 헌신은 우리 모두에게 값으로 칠 수 없는 것이었소.







마리아 논쟁이 만든것으로써,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일부에서 부인되는것은 내가 여자을 사도처럼 여겨 대했다는 것인데, 그 당시는 남자들이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한, 어떠한 여자들에게라도 지식적인 것이나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 시대였소.



이 점이 많은 작가들과 공론가들이 오늘날 놓치는 것이오 .



만약 마리아가 나의 아내였었다면 어떻한 논쟁거리도 아예 없었을게요.



더 중요한 건 확장된 공동체에서 그녀의 역할에 대해 모든 여인들의 받들어짐이 없었을게요.







그들이 마지 못해하며 그녀를 사도대열에 받아들였지만 그녀는 한번도 그들 사이에서 정식인원으로 세어진 적이 없었소.



십자가 희생 이후 마리아는 여인들 속으로 들어가 자기를 돌보지 않고 그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용기를 북돋우며 안전하게 외부에서 모일 수 있는 강한 믿음의 결연체를 구성했소.



남자들이 교리확립에 관해 논쟁하고, 지도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동안에 마리아는 치유하는 법을 다른이에게 가르치고, 두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공동체를 세웠소.







그녀는 생을 마감하기전에 딸 사라와 나의 가계의 몇 사람 그리고 일단의 미망인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소.



이 여인들 공동체가 수녀원의 시초가 되었지요. 당시에는 기도나 예배 보다는 공동체 내에서의 봉사가 더 우선이었지요.



마리아는 광범위한 내용의, 일기 , 비망록 , 새로 형성되는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등을 기록했는데 그것들이 발각되거나 해서 당시 이룬 공동체와 나아가 믿음까지 파괴될까봐 불행히도 그 기록들에 서명을 남기지 않았죠.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는 죽을 때 까지 그 문서들중 얼마를 간직했소.그것들은 필경 발견 될거요.



그녀는 아주 연로하기 까지 살다가 남서부 프랑스의 목자의 샘 근처에서 평안히 잠들었소.







자유로운 세상을 사는 여성들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셈이오.



그녀는 세대를 통해 보여진 영적각성과 자유의 횃불을 가져왔고 , 대다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그리고 여러 이유로 상상조차도 못했던 것들에 열성적으로 도전했죠.



그녀의 용기있는 생애는 사랑의힘과 존엄 , 그리고 자유의 기념비적 헌신이었소."



(본문 16 - 18 페이지)









http://blog.naver.com/sesami9/2015878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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