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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 or body ?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2-05-22 12:48:19
추천수 21
조회수   1,941

제목

soul or body ?

글쓴이

전병열 [가입일자 : 2010-10-26]
내용


고대 그리스 철학이 우주를 이데아와 현상의 세계, 영혼(soul)과 육체(body)의 세계로 구분하면서 정착된 이원론(dualism)은 물질계(physical world)와 정신계(mental world)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 이래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분리 의식이 발달하였다.







그래서일까? 인류의 삶이 만들어낸 사회(social world) 역시 이분법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류와 비주류, 지배와 피지배, 우파와 좌파, 정상과 비정상, 남성과 여성, 정통과 이단 등의 구분을 매우 예리하게 인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영원히 합쳐지지 않을 것처럼 이분법적 사회 분리는 장구한 역사 속에서 인류의 정신 속에 매우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이 이분법적 논리 속에는 이해하기 힘든 폭력이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이 후자에 대한 전자의 폭력이다. 사회는 역사와 관습을 앞세워 후자를 정죄한다. 그래서 후자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정죄를 피하기 위해 전자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든지, 아니면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점점 더 고립(?)된다. 사회는 그런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했던 많은 역사를 우리는 가지고 있다.







난 세계 역사 속에 나타난 이 두 그룹들 사이의 논쟁을 살펴볼 기회가 많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안젤무스와 아벨라르, 아퀴나스와 에크하르트, 루터와 에라스무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이들 중 하나는 주류가 되고 하나는 비주류가 되었다. 하나는 정통이 되고 하나는 이단이 되었다. 하나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확보하고 다른 하나는 당대에 정죄와 비난의 대상이 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무엇이 이들 둘 사이의 사회적 지위를 나누었는가? 저들을 나눈 건 진리와 비진리성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너무도 단순한 판단에 불과하다. 아날학파의 페르낭 브로델이 설명한 것처럼 역사는 바다 위에서 출렁이는 파도만으로 이해하서는 안 된다. 바다의 진실은 그 심연에 있는 것처럼 역사의 진실 역시 그 출렁이는 사건들의 이면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역사를 깊이 있게 관찰해 볼 때 우린 주류와 비주류, 정통과 이단이 단지 진리성 유무로 판가름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것보다는 시대성에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시대, 특별히 게르만민족의 이동과 더불어 기독교국가가 된 로마의 운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던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학을 집대성한 신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마치 그리스도교 국가인 로마의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런 주류 정신에 따라서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상은 이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펠라기우스는 그렇게 이단이 되었다. 물론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와서는 그 지위가 역전되기도 하였다. 아벨라르 역시 순탄치 않았던 그의 삶의 여정(엘로이즈와의 염문으로 아벨라르는 파문에 쳐해지기도 했던 수도사였음)은 그의 이론을 이단이 되게 하였다. 특별히 그의 사상은 스콜라신학을 집대성한 안젤무스의 이론과 상충됨으로써 정통과 이단은 자연적으로 갈리게 된다.







종교개혁 시대의 루터나 칼뱅 등 주류와 정통이 된 신학의 경우도 그렇다. 개혁주의 정신이 하나의 시대적 정신으로 자리잡은 16세기에는 개혁의 선구자들이었던 루터나 쯔윙글리, 칼뱅 등의 이론과 상치되면 가차없이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그래서 같은 종교개혁자들이었으면서도 제세례파들은 철저하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것이다. 세루베투스나 아르미니우스 역시 그런 입장에 따라서 이단이 된다.







가만히 역사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주류와 비주류, 정통과 이단의 구분은 이런 시대성 이외에도 지배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기야 시대성이 곧 지배성이겠지만 말이다. 그 시대를 지배하던 정신, 그 지배체제가 지속되는 한 주류와 정통으로서의 지위는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한 시대를 지나고, 두 시대를 지나면서 이 사회는 자연스럽게 정통과 이단을 가르고 있다.







20세기에 태어나서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나도 이 정통과 이단의 역사적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분법적 가름 의식과 주류에 편승하고자 하는 얄팍한 현존재(dasein)성이 내 의식 속에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은 자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가? 무엇이 정통이고 무엇이 이단인가?







20세기 정통과 이단의 가름을 보여주는, 그래서 나를 슬프게 하는 책 두 권이 내 서재에 꽂혀 있다. 하나는 20세기 초 영국의 가장 유명한 유신론적 작가였던 체스터튼의 와 동시대 최고의 영국 철학자요 무신론자 중의 한 사람인 버틀란트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가 바로 그것이다. 이 두 인물과 20세기를 대비해 본다면 누가 정통이고 누가 이단인가? 누가 주류이고 누가 비주류인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 때문에 하나는 반드시 정통이 되어야 하고 또 하나는 반드시 이단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는 반드시 주류가 되어야 하고 또 하나는 반드시 비주류가 되어야 하는가? 적어도 20세기에서 그 가름은 현실이 되었다.







칼 라너 와 라찡어 신부의 '신은 정의로운가? 이타적 신론 에서 난 가끔 멍하니 ...







그렇다면 과연 21세기에서는 누가 주류가 되고 누가 비주류가 될 것인가? 아니면 21세기는 그 가름의 의식이 없어지고 모두가 다 하나가 될까? 그도 아니면 그 둘 중 하나에게로 다른 하나가 흡수 통합 될까? 오늘 이 아침에 그것이 정말로 알고 싶다.







05.11.13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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