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나는 소설을 쓰고 싶다.
그 속에서 합리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 싶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지 못한다.
그건 이미 캄파넬라나 콩도르세가 품었다가 실패한 꿈이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나는 시를 쓰고 싶다.
세상의 모든 걸 함축된 언어의 진리 속에 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쓰지 못한다.
비트켄슈타인이 저 유명한 <논리철학 논고>에서 언어비판을 통해서 이미 삶의 한계를 논하였기 때문이다.
가끔씩,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대상으로부터 발견한 진리를 그림에 담아,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진리에 참여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하이데거의 <미학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관람객은 거의 없을 테니까
언제나, 나는 신을 믿고 싶다.
그 절대타자(You, the absolute other)와 마주대할 때 비로소 한 인간으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을 잘 알지 못할 때가 많다.
키에르케고르의 그 종교적 체험이 내겐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소설을 읽고, 시를 읽고, 그림을 감상하기를 즐길 뿐이다.
자신의 내면의 충동을 진리로 승화시킨 거장들은 그 현실의 왜곡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신을 믿는다.
내가 신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내게로 와야만 그를 알 수 있다는 걸 칸트로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신을 믿는다. 신을 내 안으로 초청하기 위해서...
이것들이 바로 내 안의 충동, 아니 나의 영감(inspiraion)들이다
05.11.26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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