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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공 / 정백체 * 유백체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2-04-21 19:47:55
추천수 34
조회수   2,121

제목

법륜공 / 정백체 * 유백체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Related Link: http://blog.naver.com/agent008/70002588341



8.5 주천(周天)











도가(道家) 중에서 대소주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이 주천인가를 이야기해 보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주천은 임독(任督) 두 맥을 이어 놓는 것이다. 이 주천은 피모주천(皮毛周天)으로 아무것도 아니며 다만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으로 이것을 소주천(小周天)이라고 한다. 또 일종의 주천이 있는데 그것을 소주천이라고 하지 않고 또 대주천(大周天)이라고도 하지 않는 것으로, 선정(禪定) 중에서 수련하는 일종의 주천(周天)형식이다. 그것은 신체 안에서, 니환(泥丸)으로부터 한 바퀴 돌고는 내려와서, 신체 안에서 단전(丹田)에 이르러 한 바퀴 돌고는 올라오는 내재적 순환으로서, 그것이 진정한 선정 중에서 수련하는 주천이다. 이런 주천은 형성된 이후에 또한 하나의 아주 강한 에너지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그런 다음 일맥이 백맥을 이끌어 다른 맥을 모두 이끌어 열게 한다. 도가는 주천을 이야기하지만 불교는 주천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불교는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석가모니는 그의 그 일련의 법을 전할 때에 공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공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공법도 그의 수련연화(修煉演化)형식이 있었다. 불교의 맥은 어떻게 가고 있는가? 백회혈로부터 시작하여 이곳에서 완전히 열린 다음에 나선식으로 정수리로부터 몸 아래로 향하여 발전하며 최후에는 이런 형식으로 백맥을 이끌어 연다.







밀종(密宗)의 중맥(中脈) 역시 이 목적이다. 어떤 사람은 중맥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 왜 밀종은 중맥을 수련해낼 수 있는가? 기실 사람 신체의 모든 맥을 다 합치면 만여 갈래에 그치지 않는다. 마치 혈관처럼 종횡(縱橫)으로 교차되었으며 혈관보다도 더 많다. 내장의 틈새 부분에 혈관은 없지만 오히려 맥은 있다. 정수리로부터 신체의 각개 부위에 이르기까지 역시 종횡으로 교차된 맥락으로서, 그것들을 연결시키면 시작할 때에는 아마 곧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어 통하게 한다. 그런 다음 점차 넓어져 차츰 한 갈래의 곧은 맥을 형성하게 한다. 이 맥을 축으로 자전(自轉)하며 그것의 수평으로 도는 의념 중의 몇 개 바퀴를 이끄는데, 목적은 역시 신체의 모든 맥을 전부 이끌어 열려는 것이다.







우리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수련은 일맥이 백맥을 이끄는 이런 형식을 피하여, 시작부터 백맥을 이끌어 동시에 열며 백맥을 동시에 운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단번에 아주 높은 층차에서 연마하며 매우 낮은 것을 피한다. 일맥이 백맥을 이끌 경우, 당신이 그것을 전부 이끌어 열려고 한다면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연마하여도 여전히 힘겨우며, 어떤 사람은 몇십 년을 수련해야 하는바 아주 어렵다. 아주 많은 공법에서는 일세(一世)에 수련될 수 없다고 하며, 허다한 고심대법(高深大法) 중에서 수련하는 사람은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것으로, 그는 명(命)을 닦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수명을 연장해가며 수련할 수 있으므로 수련하면 아주 긴 시간을 할 수 있다.







소주천은 기본적으로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이지만 대주천은 연공으로서 바로 사람의 진정한 수련이다. 도가에서 가리키는 대주천은 우리처럼 이렇게 맹렬하지 않으며, 백맥을 전부 열어 놓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몇 갈래 맥의 운행으로서, 손의 삼음삼양(三陰三陽), 발 아래, 두 다리에서 줄곧 머리카락까지 신체를 다 한 번 도는, 이것을 대주천 순환이라고 한다. 대주천에 올라오면 곧 진정한 연공이므로 일부 기공사는 대주천에 대하여 전하지 않으며, 그가 전하는 것은 바로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히 하는 것이다. 일부 사람도 대주천을 이야기하지만 그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았고, 당신 자신도 열지 못한다. 아무것도 넣어주지 않고 스스로 의념에 의하여 열려고 하는데, 어찌 말처럼 쉽겠는가! 마치 체조를 하는 것과 같은데 그것을 열리게 할 수 있는가?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린 것으로, 내재적인 이 ‘기제(機制)’를 전부 당신에게 넣어주어야만 비로소 이러한 일종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도가는 역대로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보고 있다. 그는 우주의 밖이 얼마나 크면 안이 얼마나 크고, 밖이 무슨 모양이면 안도 무슨 모양이라고 인정한다. 이것을 이야기하게 되면 불가사의하고 그리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이 우주가 이렇게 큰데 어찌 사람의 신체와 비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런 하나의 도리를 이야기하겠다. 우리 현재의 물리학에서 물질성분을 연구함에 있어서 분자·원자·전자·양성자·쿼크로부터 줄곧 중성미자에까지 이르렀는데, 더 아래로는 얼마만한 크기인가? 그 일보에 도달하면 현미경으로는 이미 보아내지 못하는데, 더 아래의 극히 작은 미립자는 무엇인가? 모른다. 기실 우리 현재의 물리학에서 인식한 요만한 것은 이 우주 중의 가장 미소한 미립자와 비교해 볼 때, 차이가 너무나도 멀다. 사람이 육신이 없을 때 사람의 눈이 물건을 봄에 일종 확대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며 미시적인 것을 볼 수 있다. 층차가 더욱 높을수록 미시하[微觀下]에서 보게 되는 것은 더욱 크다.







석가모니는 그런 하나의 층차 중에서 그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 학설을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이 은하계 중에 또 우리 인류처럼 이런 색신(色身)을 가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한 알의 모래알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우리 현대 물리학의 인식과 서로 맞물리고 있다. 전자(電子)가 원자핵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형식과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돌아가는 것이 뭐가 다른가?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미시하에서 한 알의 모래알에 삼천대천세계가 있으며, 그것은 마치 하나의 우주와도 같이 안에는 생명이 있고 물질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만약 정말이라고 한다면 여러분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그 모래 안의 세계 속에 또 모래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 모래 속의 모래 속에는 또 삼천대천세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모래 속의 모래 속의 삼천대천세계에 또 모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래로 캐 내려가면 무궁무진하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는 여래, 이러한 층차에 도달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한마디 말을 했다 ― ‘크기로는 밖이 없고 작기로는 안이 없다.’ 크기로는 우주의 변두리를 보아내지 못하며, 작기로는 그것의 본원 물질의 가장 미소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내지 못한다.







어떤 기공사는 말한다 ― 땀구멍 속에 도시가 있으며 그 속에서 기차가 달리고 자동차가 달린다. 듣기에는 아주 허황하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의 각도에 서서 진정하게 이해하고 연구를 하게 되면 이런 설이 그리 허황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날 내가 천목 열기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은 천목이 열려 이러한 광경이 나타나게 되었다 ― 그는 그의 앞이마의 이 한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내달리지만 영원히 끝에 이르지 못하는 것 같다. 매일 연공할 때 모두 이 한 갈래 큰길에서 밖으로 내달리는데 양쪽에는 산이 있고 물이 있으며 뛸 때에 또 도시를 지나게 되며 또한 허다하고도 허다한 사람을 보게 된다. 그는 이것을 환각이라고 여긴다. 어찌된 영문인가? 아주 똑똑히 본 것으로 환각이 아니다. 내가 이야기한다면 만약 사람의 신체가 정말로 미시하에서 그렇게 홍대(洪大)하다면 그것은 곧 환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가의 연공에서는 역대로 인체를 하나의 우주로 보기 때문에, 만약 정말로 하나의 우주라면 앞이마로부터 송과체까지 10만 8천리도 넘을 것인즉, 당신이 밖으로 돌진하여 보라, 아득히 먼 것이다.







만약 수련과정 중에서 대주천(大周天)을 전부 통하게 한 후라면, 수련자에게 일종 공능을 가져다줄 수 있다. 무슨 공능인가? 여러분 알다시피 대주천을 자오주천(子午周天)이라고도 하며 건곤운행[乾坤運轉]이라고도 하는가 하면, 하차운행[河車運轉]이라고도 한다. 매우 얕은 층차 중에서 대주천의 운행은 하나의 에너지 흐름을 형성하는데 그것이 점차적으로 밀도를 크게 하여 더욱 높은 층차 중으로 전화할 수 있으며, 밀도가 아주 큰 하나의 에너지띠[能量帶]로 변할 수 있다. 이 에너지띠 그것은 운행하고 있으며 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아주 얕은 층차에서 천목으로 보게 되면, 그것이 신체 속의 기(氣)로 하여금 위치를 바꾸게 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심장(心)의 기가 장[腸子]으로 가는가 하면, 간(肝)의 기가 위(胃)로 간다 ……. 만약 미시하에서 본다면 그것이 운반하는 것이 아주 큰 것임을 보아낼 수 있다. 만약 이 에너지띠를 체외로 내보내면 그것은 곧 운반공[搬運功]이다. 공이 아주 강한 사람은 아주 큰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데 바로 대운반이고, 공이 아주 약한 사람은 아주 작은 물건을 운반할 수 있는데 바로 소운반이다. 이것이 바로 운반공의 형식과 그것의 생성(生成)이다.







대주천은 직접 연공하는 것이므로 부동한 상태와 공의 형식을 가져올 수 있으며 그것은 또 우리에게 하나의 매우 특수한 상태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무슨 상태인가? 여러분은 아마 고서 중에서, 예컨대 『신선전(神仙傳)』 또는 『단경(丹經)』·『도장(道藏)』·『성명규지(性命圭旨)』 중에 모두 이런 한마디 말이 씌어져 있음을 보았을 것인데 ‘백일비승(白日飛升)’이라고 한다. 바로 대낮에 이 사람이 날아올랐다는 것이다. 기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겠다. 대주천이 통하기만 하면, 이 사람은 공중으로 뜰 수 있는데, 바로 이렇게 간단하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처럼 여러 해 연공하였는데, 대주천이 통한 사람 역시 소수가 아닐 것이다. 내가 말한다면 몇만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정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해도 허황하지 않다. 왜냐하면 대주천 그것은 필경 갓 연공(煉功)하기 시작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사람들이 나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그가 공중으로 솟아오름이 보이지 않는가? 속인사회의 상태는 파괴할 수 없는 것으로 속인사회의 사회형식을 함부로 파괴하거나 개변할 수 없다. 사람이 모두 하늘을 날아서야 되겠는가? 그것이 속인사회인가? 이것이 주요한 한 방면이다. 다른 한 면으로는 속인 중의 사람은 사람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반본귀진하기 위한 것이므로 또 하나의 오성(悟性) 문제가 있다. 그가 많은 사람이 확실하고도 확실하게 모두 날 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도 가서 수련하는데, 곧 오성 문제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당신이 수행(修行)하는 것을 또 함부로 사람더러 보게 해서는 안 되며, 사람에게 보여줄 수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 역시 수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주천이 통한 이후에 당신의 손가락 끝, 발가락 끝 또는 어느 한 부위를 잠가 놓기만 하면 당신은 날지 못한다.







우리가 대주천이 곧 통하려 할 때 흔히 하나의 상태가 출현하게 되는데, 어떤 사람은 가부좌할 때 신체가 늘 앞으로 기울어진다. 뒷등이 비교적 잘 통하여 뒷등이 특히 가벼우므로 앞이 무거운 것을 느끼게 되며, 어떤 사람은 뒤로 젖혀지는데, 바로 뒷등이 무겁고 앞이 가벼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전부 다 아주 잘 통했다면 당신은 위로 들썩거릴 수 있고 자신이 위로 솟구치며 지면을 떠나는 감각이 있을 수 있다. 일단 진정으로 뜰 수 있을 때에 당신으로 하여금 뜨지 못하게 하지만 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공능이 나오는 사람은 양쪽에 있다. 어린이는 집착심이 없으며 노인, 특히 노년 부녀자는 집착심이 없으므로 공능이 쉽게 나오며 유지하기 쉽다. 남자 특히 젊은 사람은 일단 공능이 있게 되면 그가 과시하려는 심리를 면하지 못하게 되며 동시에 그는 아마 그것을 속인 중의 일종 경쟁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이리하여 그것이 존재함을 허용하지 않으며 연마해냈어도 그것을 잠가 버린다. 한 곳만 잠가 버리면 이 사람은 곧 뜨지 못한다. 또 절대적으로 당신에게 이 상태가 전혀 나타나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 아니며 아마 당신더러 시험해 보게 하는데, 어떤 사람은 유지해 나아갈 수 있다.







각지에서 학습반을 열 때 모두 이런 정황이 있었다. 내가 산동(山東)에서 학습반을 열 때에 제남(濟南)의 수련생, 북경(北京)의 수련생이 모두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 스승님, 저는 어찌된 일입니까, 길을 걸으면 늘 땅에서 뜨려 하며 집에 누워 잠을 자도 뜨고 이불을 덮으면 이불마저도 뜨려고 하는데, 늘 풍선처럼 위로 뜹니다 라고 했다. 내가 귀양(貴陽)에서 학습반을 열 때, 귀주(貴州)의 노수련생은 한 할머니였는데 그녀의 방안에는 침대가 두 개였고 벽에 붙여서 한쪽 벽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그녀는 침대 위에 앉아 가부좌를 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뜨는 것을 느껴 눈을 뜨고 보니 저쪽 침대 위에 떠 있었다. 그녀가, 나는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자, 또 뜬 채로 돌아왔다.







청도(靑島)의 한 수련생은 점심휴식 시간에 실내에 사람이 없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했다. 그는 가부좌를 하자마자 떠올랐고 위로 들썩거림이 아주 심했는데 1미터 높이나 되었다. 뜬 다음에는 또 떨어져 내려와 쿵쿵 반복해서 들썩거려 이불마저 땅에 떨어졌다. 약간 흥분도 되고 또 겁이 조금 났으며 들썩들썩 거리면서 온 점심시간 동안 오르내렸다. 마지막에 시작종이 울리자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 다른 사람더러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이건 무엇을 하는 것인가, 빨리 멈추자 라고 하자 멈췄다. 이것이 바로 왜 노인들이 파악할 수 있는가 함이다. 만일 젊은이라면 시작종이 울리자, 다들 와서 봐라, 나는 날았다 라고 할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과시심을 그리 쉽게 파악할 수 없음이 바로 여기에 있다 ― 봐라, 내가 이 공을 얼마나 잘 연마했는가, 나는 날 수 있다. 그가 과시만 하면 없어지며 이렇게 존재함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아주 많으며 각지 수련생에게 모두 있다.







우리는 올라오자마자 곧 백맥이 전부 열린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백분의 팔, 구십의 사람들은 현재 모두 온몸이 가벼운 상태에 도달하였으며 병이 없다. 동시에 우리는 이야기했다. 이 학습반에서 당신을 이런 일종의 상태로 밀어줄 뿐만 아니라, 당신의 신체를 완전히 정화(淨化)시켜 주고 또 당신의 신체 속에 허다한 것을 넣어주며 학습반에서 당신더러 공이 나오게 하는데, 내가 당신을 잡아끌어 올려서 더 앞으로 보낸 것과도 같다. 내가 학습반에서 줄곧 여러분에게 설법하여 여러분의 씬씽(心性)도 줄곧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 많은 사람은 이 강당에서 나간 다음, 당신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낄 수 있다. 보증하고 당신의 세계관마저 전변(轉變)이 생길 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장래에 어떻게 올바른 사람이 되는 지를 알게 되며, 그렇게 얼떨떨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는데, 보증코 이러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씬씽(心性)은 이미 따라 올라온 것이다.







대주천에 대해 말한다면, 비록 당신으로 하여금 뜨지 못하게 하지만 당신은 온몸이 가볍고 길을 걸어도 바람이 이는 듯한 감이 있게 된다. 과거에는 몇 걸음만 걸어도 힘들었지만 현재는 얼마나 멀리 걸어도 매우 가뿐함을 느낄 수 있으며, 자전거를 타면 마치 누가 당신을 밀어 주는 것 같으며, 계단을 오르면 얼마나 높이 올라도 힘들지 않는데, 보증하고 이러하다. 이 책을 보고 스스로 수련[自修]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마땅히 있어야 할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나 이 사람은 내가 원치 않는 말을 나는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꼭 참말이어야 한다. 특히 이런 정황에서 내가 설법할 때에 내가 만일 참말을 하지 않고 여기에서 허황한 말을 하며 과녁을 겨냥하여 활을 쏘듯이 하지 못하고 함부로 어지럽게 이야기한다면, 나는 바로 사법(邪法)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우주 중에서 모두 보고 있는 것으로, 당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걸으면 곧 안 된다.







일반인은 단지 이러한 하나의 주천이 있다는 것을 알면 끝인데, 기실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 신체가 완전히 고에너지물질로 재빨리 대체·전화됨에 도달하자면 또 일종 주천형식의 주향(走向)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 신체의 모든 맥을 이끄는 주향, 그것을 묘유주천(卯酉周天)이라고 한다. 아마 아는 사람이 아주 적을 것이다. 책에서 어떤 때는 이러한 명사가 제기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으며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모두 이론을 둘러싸고 빙빙 도는데, 비밀 중의 비밀이기 때문이다. 우리 여기에서는 모두 당신에게 이야기해주겠다 ― 가히 백회혈(百會穴)로부터 시작하여(또 회음혈로부터 나올 수도 있음) 나와서는 음양 양면의 경계로 가며, 귀 옆으로부터 내려온 다음 어깨를 지나 내려온다. 손가락 사이를 하나하나씩 지난 다음, 신체의 측면으로 내려가 발밑을 지나 사타구니 한 측면으로 올라온다. 그런 다음 다시 다른 한 측면으로 내려가서는 다시 발밑을 거쳐 신체의 측면으로 올라온다. 손가락 사이를 하나하나씩 지나 한 바퀴 돌아서 정수리에 이르는, 이것이 바로 묘유주천이다. 남들이 책 한 권을 쓸 수 있는 것을 나는 몇 마디로 말해냈다. 내 생각에는 이것을 무슨 천기(天機)라고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은 이런 것이 모두 아주 진귀한 것이라고 여겨, 아예 이야기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도제(徒弟)에게 전할 때만 묘유주천을 이야기한다. 내가 비록 이야기는 하였지만 누구도 의념으로 인도하고 통제하여 연마하지 말라. 당신이 연마한다면 곧 우리의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아니다. 진정한 고층차로의 수련은 무위(無爲)적인 것으로 어떤 의념활동도 없으며 당신에게 전부 다 만들어진 것을 준다. 이러한 것은 모두 자동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이런 내재적인 기(機)가 당신을 연련(演煉)하여 주고 있으며 때가 되면 그것은 자전(自轉)할 수 있다. 어느 날 당신이 연공할 때에 머리를 젓게 되는데, 머리를 이쪽으로 저으면 그것이 바로 이렇게 돌고, 머리를 저쪽으로 저으면 바로 저렇게 돌아, 양쪽으로 모두 돌게 된다.







대·소주천이 통한 후에 가부좌를 하면 머리를 끄떡일 수 있는데 이것은 에너지가 통과하는 현상이다. 우리가 연마하는 법륜주천법(法輪周天法) 역시 마찬가지로서 우리는 이렇게 연마한다. 기실 당신이 연마하지 않을 때에도 그것은 스스로 돌고 있다. 평시에 영원히 돌아가고 있으며 당신이 연마할 때는 이 기(機)를 가강(加强)하는 것이다. 우리는 법이 사람을 연마시킴[法煉人]을 이야기하지 않는가? 평시에 당신은 당신의 그 주천이 늘 순환하고 있음을 발견하는데, 당신이 연마하지 않아도 밖에다 넣어준 이 한 층의 치지(氣機)는, 바로 한 층의 외재적인 대맥(大脈)이 당신의 신체를 이끌어 연마[煉]하고 있는 것으로, 모두 자동적이다. 그것은 또 반대로 돌 수 있고, 정반(正反) 양면으로 모두 돌 수 있으며, 시시각각으로 모두 당신의 맥을 통하게 하고 있다.







그러면 주천을 통하게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주천을 통하게 하는 자체는 연공의 목적이 아니다. 당신이 주천이 통했다 해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더 수련해나가면, 목적은 주천의 이런 형식을 거쳐서 일맥이 백맥을 이끌게 하며 신체의 맥, 모든 맥을 전부 이끌어 여는 데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일을 했다. 계속 연마하여 내려가면 어떤 사람은 대주천을 통할 때 맥이 연마됨이 아주 넓어 마치 손가락과 같으며 안이 아주 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에너지도 아주 강하기 때문에 에너지 흐름이 형성된 후에 그것은 아주 넓어질 수 있으며 또한 아주 밝아질 수 있다. 이건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연마해야 하는가? 사람의 신체로 하여금 백맥이 모두 점차적으로 넓어져 에너지는 갈수록 더욱 강하고 갈수록 더욱 밝게 변해야 한다. 최후에는 만여 갈래가 한데로 이어져, 일종의 맥이 없고 혈(穴)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여 전반 신체가 하나로 이어지는데, 이것은 통맥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적이다. 그것의 목적은 사람의 신체를 전부 다 고에너지물질로 전화하는 데 있다.







이 일보까지 연마되었을 때에 사람의 신체는 기본상 고에너지물질로 전화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쓰젠파(世間法) 수련의 최고 층차로 연마되었으며 인체의 육신은 이미 최정점(最頂點)으로 수련되었다. 이 일보까지 왔을 때에 그에게 또 일종의 상태를 가져다 줄 수 있다. 무슨 상태인가? 그의 공은 아주 풍부하게 나온다. 속인 신체의 수련, 즉 쓰젠파(世間法) 수련과정에서 사람의 모든 특이공능(잠재능력), 일체 것들이 전부 다 나오게 되지만 속인 중에서 수련하므로 대부분은 잠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공기둥은 이미 상당히 높게 자랐으며 일체 공의 형식은 모두 강대한 공에 가지(加持)되어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우리 이 현존의 공간에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뿐 다른 공간을 제약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우리 속인의 육체로 수련하여 나온 공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상당히 풍부해졌으며 각개 공간 중과 부동한 공간 중의 신체의 각종 존재형식에서 모두 상당히 큰 변화가 발생했다. 그 신체가 갖고 있는 것, 매 한 층 공간의 신체가 갖고 있는 것은 모두 상당히 풍부해졌는데 보기에는 사람을 매우 놀라게 할 지경이다. 어떤 사람의 신체는 곳곳이 눈이며 온몸의 땀구멍마저도 모두 눈이고, 그의 전체 공간장(空間場) 범위 내에 모두 눈이 있을 수 있다. 불가공이기 때문에 어떤 신체는 온몸이 모두 보살·부처의 형상이다. 각종 공의 형태는 이미 극히 풍부한 정도에 도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허다하고도 허다한 생명체가 나타난다.







이 일보에 이르렀을 때 그것은 또 일종의 상태가 출현하게 되는데 ‘삼화취정(三花聚頂)’이라고 한다. 그것은 매우 뚜렷한 하나의 상태이며 역시 아주 눈에 띄는 것으로, 천목 층차가 높지 않은 사람도 보아낼 수 있다. 머리 위에는 세 송이 꽃이 있다. 한 송이는 연꽃[蓮花]이지만 우리 물질공간 중의 연꽃[荷花]이 아니며, 그리고 두 송이 역시 다른 공간의 꽃으로서 대단히 미묘(美妙)하다. 세 송이 꽃은 차례대로[輪番] 정수리에서 도는데, 바른쪽으로 돌고[正轉] 반대쪽으로 돌며[反轉], 세 송이 꽃은 또 자전(自轉)한다. 매 한 송이 꽃은 한 가닥 큰 기둥이 있으며 꽃의 직경과 마찬가지로 굵다. 세 가닥 큰 기둥이 하늘 꼭대기로 직통하는데 그것은 공기둥이 아니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일종의 형식으로서, 굉장히 현묘(玄妙)하여 당신 자신이 보아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이 일보까지 수련되었을 때 신체는 희고도 깨끗하며 피부 역시 부드러워진다. 이 일보에 이르렀을 때, 즉 쓰젠파(世間法) 수련의 최고형식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아직 정점에 도달한 것이 아닌바, 여전히 계속 수련해나가야 하며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더 앞으로 나아가면 곧 쓰젠파(世間法)와 추쓰젠파(出世間法) 사이의 과도 층차에 진입하게 되는데 정백체(淨白體)[정백체(晶白體)라고도 부름] 상태라고 한다. 왜냐하면 신체가 쓰젠파(世間法) 최고형식으로 수련되었어도 사람의 육신이 최고 형식으로 전화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진정하게 그 형식에 들어갈 때, 전반 신체는 완전히 고에너지물질로 구성된 것이다. 왜 정백체(淨白體)라고 하는가? 그가 이미 절대적으로 고도의 순정(純淨)함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천목으로 본다면 온 신체가 투명한 것이며 마치 투명한 유리와도 같아,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런 일종의 상태가 나타날 수 있다. 투철하게 말하면 그는 이미 하나의 불체(佛體)가 되었다. 왜냐하면 고에너지물질로 구성된 신체와 우리 자체의 신체는 이미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보까지 도달하였을 때에 신체에서 출현하는 일체 공능과 술류(術類)의 것들을 단번에 전부 내버리게 되며, 그것을 하나의 아주 깊은 공간 중에 부려 넣게 되는바, 쓸모가 없으며 지금 이후로 더는 쓸모가 없다. 다만 당신이 장래에 수련되어 도를 얻는 그날에, 당신은 당신의 수련과정을 한번 돌이켜 보며 그것을 꺼내어 볼 뿐이다. 이때 두 가지 물체만 존재한다 ― 공기둥이 아직 있고 수련된 원영(元嬰)이 이미 아주 크게 자랐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물체는 모두 하나의 매우 깊은 공간에 있으며 일반인은 천목 층차가 높지 않아 보이지 않으며 그는 다만 이 사람의 신체가 하나의 투명체임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정백체(淨白體) 상태는 하나의 과도 층차이기 때문에 더 수련해나갈 때면, 곧 진정하게 추쓰젠파(出世間法) 수련에 들어가는데 또한 불체(佛體)수련이라고도 한다. 전반 신체는 공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때 사람의 씬씽(心性)은 이미 안정되었다. 다시 새롭게 연마를 시작하여 새롭게 공능이 나오기 시작하지만, 그것을 공능이라고 하지 않으며 ‘불법신통(佛法神通)’이라고 한다. 그것은 모든 각개 공간을 제약하며 위력이 무궁하다. 장래에 당신 자신이 부단히 수련함에 따라 더 높은 층차의 것은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가와 수련의 존재형식을 스스로 곧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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