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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야말로... "기독교의 잃어버린 끈" / 오리게네스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2-04-04 23:50:28
추천수 32
조회수   2,756

제목

환생이야말로... "기독교의 잃어버린 끈" / 오리게네스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Related Link: http://blog.naver.com/amiga3000/60137392799

출처는 나는 아흔여덟번 환생했다.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환생





환생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모든 경전과 신화의 사전





내생에 신비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오늘을 내일로, 이생의 일을 내생으로 미루지말라



-예수 그리스도- (그노시스의 경전인 피스티스 소피아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자 오리겐





종교의 역사가 피와 부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사상에서

환생을 무자비하게 추방함으로써

교회의 역사가 깊고 치욕적인 오점을 남겼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망각 속에 상처는 아물었고,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한때 환생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야심적 수단이 되기 전까지,



환생은 박해받던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환생은 초기 기독교 신부들과

그노시스교도(Gnostics)- 예수의 비의적인 가르침을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헌신한 사도使徒적 전통을 가진 신비주의 기독교인들- 에 의해 전수되어 왔는데,



그 개념은 신구약의 경전과 일치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통한 구원 사상과도 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원시 기독교의 초창기부터, 깨달음을 찾기로 결심한 사람들에게



육신이 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단조로운 생과 사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예수는 영적인 완전성을 촉구하였는데,

그것은 육신이라는 짐에서 벗어나 신과 다시 화합하도록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이런 신학적 체계를 세운 주요 인물은 오리겐(Origen)이었다.



니사의 그레고리 성인(St.Gregory of Nyssa)은 그를



'3세기 기독교 학문의 왕자'라고 불렀으며,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외한 교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했다. 오리겐은 경전의 권위를 세우는데 헌신하는 한편, 자신의 고향인 알렉산드리아를 400년 넘게 지배해 온 플라톤의 사상에 깊이 심취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성한 영혼이 육체에 들어오는 것은

언젠가 썩어 버릴 육체보다 자신이 더 우위임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에 공감했다. 오리겐은 <니케아 시대 교부敎父들의 선집選集>에 실린 서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영적이고 이성적인 존재가 육체와는 별도로 생명을 갖고 있으며,

육체 안에 있는 것이 육체 밖에 있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육체는 부차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며

단지 이성적 존재의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때때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육체가 필요한 사람은 육체를 걸치며,

반대로 타락했던 영혼이 더 나은 존재로 상승하면 육체는 다시 무로 돌아간다.

그래서 육체는 나타났다 다시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오리겐은 자신의 주요 저서이며 최초의 체계적인 기독교 신학 작품인

<드 프리시피스 : De Principii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영혼은 전생의 승리에 의해 강해지거나 또는 패배에 의해 약해져서



이 세상에 돌아온다.



이 세상에서 명예나 불명예를 겪는 것은 전생의 선업이나 악업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번 생에서 하는 일이 내생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이다.





말년에 신앙문제로 이단시되어

로마인들에게 고문과 투옥을 당한 오리겐,

그리고 로마에 최초의 기독교 학교를 세운 저스틴 마티르와 같은 교부들은

성경을 가장 광의적으로 그리고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오리겐이 주창한 우주적 신학의 신비주의적 견해가 성경을 문자 그래도 해석하려는 원리주의 자들에게 항상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이 환생설에 대하여



심하게 반대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이후,



교회가 비밀스러운 숭배집단의 형태에서 탈피하여



정치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공식기관으로 대두하면서부터이다.







기독교의 박해







로마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된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한 계기가 된 일이 있는데 참고글을 앞부분에 추가합니다..







참 고







콘스탄틴 (Constantine)황제는 처음부터 기독교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를 로마제국 국민들에게 부여할 마음이 없었다. 다만 정도가 덜 했을뿐이지 기독교를 탄압하는 정책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콘스탄틴 황제는 로마 북부의 티베르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안(Milvian) 다리를 사이에두고 적군인 막센티우스(Maxentius)와 치열한 전쟁중이었다. 하지만 콘스탄틴의 군대는 상대편의 군사력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전쟁에 패할 위기에 처해진 콘스탄틴은 걱정과 안타까움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든 중에 환상을 보게되는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부터 따온 머릿글자를 보게되며 이 상징을 새기고 전쟁에 임하면 이기라는 계시를 받는다.







콘스탄틴이 본 십자가는 이른바 키-로(Chi-Rho)라고 하는 십자가 심볼이다.







콘스탄틴은 이를 신의 계시(신의 당부:神託)로 생각하고 병사들의 방패와 투구에 환상으로 본 그 상징의 기호를 그려넣고 전쟁에 임하여 불리하던 상황을 역전시켜 승리로 장식하게 된다.







Chi는 그리스어로 X이며 Rho는 그리스어로 R이다. 그리스어로 Christ(그리스도)의 첫 두글자가 된다. 키-로 심볼은 아래에서 보는바와 같이 X와 P가 연합된 것이다







이 전쟁의 승리로 서방을 손에 넣게된 콘스탄틴은 이 전쟁의 승리가 자기에게 환상을 보여준 신이 가져다 준것이라고 믿게되었으며 자신이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기에 이르며 313년 밀라노에 돌아와



밀라노칙령Edict of Milan을 선포하였다.



이 칙령은 모든 종교를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으며 예배를 할수 있다는 선언인 것이었다. 동시에 로마제국에 몰수 되었던 교회의 재산을 환원 받게 되었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이 인정한 다른종교와 동일시 하게 된것이다.





로마 황제로서는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된 콘스탄틴 대제는 자신이 군사대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 신앙덕택이라고 생각했따. 이때 이미 환생에 대한 박해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콘스탄틴은 312년 밀비안 다리의 전투에서 자신보다 우세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하기 직전 태양 위에 십자가 모양으로 그려진 빛을 보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자신이 기독교의 수호자로 선택받았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는 종교의 자유를 선포했다. 이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기독교인들도



결국에는 국가에서 자신들의 종교를 용납해 준다는사실을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기독교는 국교가 되었다.



불법적인 사교似敎단체로 처형되고 핍박받던 기독교가 20년 만에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가 베푼 호의와 선물에 대해 교회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교회의 기본 구조는 엄격히 황제의 정치적인 설계에 따라서 만들어졌으며, 결국 신도들은 윤리와 신앙과 헌신보다는 개인적 이익과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었다. 주교를 임명할 때도 그의 영적 지도력보다는 그의 존재가 로마 제국의 통합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가 기준이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가 명목상의 교인들, 즉 선善의 추구보다는 사회, 정치, 경제적 이유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1차 니케아 회의







콘스탄틴 대제는 자신이 이해한 것이 기독교의 정통 메시지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325년 니케아 회의를 소집했다. 그 회의에서 기독교의 정통성을 결정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교회와 국가의 강력한 연합이 정통과 이단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은 항상 황제의 의사에 의해 좌우되었다.



기독교의 정통 교리는 단 두 번의 생을 인정했다. 하나는 육신 안에서의 생이고, 또 하나는 내세에서 부활한 생이다.





니케아 회의의 이런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주교들은 즉시 배척당했다.



한편, 교회의 세속화에 환멸을 느낀 기독교인들은 따로 수도원 운동을 시작했다. 세상을 멀리하기 위해서기보다는 세속적인 교회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막에 정착하기 시작한 이들은 예수의 삶처럼 순수하고 소박한 기독교의 원래 모습을 보전하려고 애썼다. 380년, 국가에서 기독교인 중에 자유사상가들을 범죄자로 선포하고 처벌하기 시작하면서 초기 교회의 분열은 심화되기 시작했다.



교회와의 상의도 없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내린 데살로니카 칙령은



"우리 제국의 치하에 있는 모든 국민들은,

베드로 사도로부터 로마인에게 전해졌으며

오늘날까지 전통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이 신앙을 따라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칙령을 좀더 살펴보면....



그리고 이 신앙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가톨릭 교회가 어떤 이들을



광인으로 판결하고 이단으로 규정하든지

그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단자는 우선 신의 벌을 받아야 할 뿐 아니라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권한에 의해 처벌을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단은 더 이상 단순한 죄가 아니다. 그것은 사형까지도 받을 수 있는 범죄이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단자(heretic)'라는 말의 어원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 이상의 의미는 없다.



385년, 이단을 심판하는 재판부는

프리실리안파(Priscillian sect)에 속한 7명의 스페인 신도들을 유죄라고 판결했는데, 이들은



교회와 국가의 야만적 결탁으로 인해 희생된 최초의 환생주의 순교자였다. 그러나 그 이후 150년이 넘도록 환생설을 비난하는 어떤 공식적 칙령도 내리지 않았다.



사막에 살던 기독교인들 - 그들 중 다수가 그노시스교도이거나 적어도 오리겐의 성경 해석을 따르던 사람들이다-은



교회 정책의 주도 세력으로부터 간섭을 거의 받지 않고 그들의 삶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오리겐의 가르침에 대한 적대감은 점점 커져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에는 극에 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오리겐파와 반反오리겐파 간의 논쟁을 판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54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종교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그는 오리겐의 가르침을 비난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결과였다. 왜냐하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529년, 환생설 연구의 중심이며 신新플라토니즘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테네 대학을 폐교시킨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후에 오리겐에 대해 15개 조항이 포함된 파문을 선포했다.



거기에는 기독교에서의 제명을 비롯하여 교회의 공식적인 저주가 들어 있었다.

15개 항목 중 4가지는 전생, 즉 넓은 의미로 환생에 대한 것이었다.

그 첫번째 항목은 다음과 같다.







만일 누구든지 터무니없이





영혼의 선재先在를 주장하거나,





영혼의 복원復原을 주장한다면 그들 파문하라.







2차 니케아 회의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파문 문서를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위헌적違憲的으로 열린 제2차 종교회의를 위한 예비회의 석상에서 제출한 것으로 보인다.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 8년 동안 연금되어 있던 비질리우스 교황은



심의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 독재적인 황제의 제안을 인가하는 일은

회의에 참가한 주교(동방 교회의 대표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들에게 맡겨졌다.



환생설에 대한 추방이 전체 성직자의 모임에서 토의되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가史家들은 수세기 동안 제2차 종교회의에서 이 파문이 채택되었을 것이라고 잘못 추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보면 공식적인 비준比準의 문제는 별로 상관이 없다.





중요한 것은 553년 종교회의 이후



교회가 환생의 교리를 추방했다는 점이다.

왜 환생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분노를 초래했는지 그 이유는 해석하기에 달렸다.

그러나 환생주의자들의 자신감이

독재적인 지도자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환생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즐거움이라는 유혹도 지옥불의 협박도 먹혀들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신에게로 인도해 줄 사제나 고해성사 같은 종교의식도 필요없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구원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교회가 불필요하게 신도들에게 의존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교회의 입장에서는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교회에 굴복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홀저는 <운명의 패턴>이라는 저서에서



"교회는 신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심판의 날이라는 채찍이 필요했다.



교회가 환생에 대한 믿음이 퍼지는 것을 금지한 것은



교회 자신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공식노선에서 벗어나게 되면 정통 교리의 수호자들에게 무참하게 처형당했다. 그러나 공개고문이나 사형을 포함한 극단적인 보복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단적인 신앙에 매달리는 기독교 종파들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들 종파들은 카타리즘(Catharism : 카타르시스 혹은 정화의 종교란 뜻으로 원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메소포타미아의 환생주의자들인 마니교도를 일컫는 말이다) 의 보호 아래 모였다.



항상 자신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믿었던 카타르(Cathar)들은

트라체의 파울리시안, 불가리아의 보고밀, 발칸의 파타렌,

그리고 남프랑스의 알비주의파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편 다른 그룹들은 북부 이태리와 독일에서 번성했다.



이단자들을 제거하는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종교 재판의 끔직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카타리즘은



"매우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단호한 억압 정책에도 전혀 굴하지 않아서



한때는 기독교 자체의 영구적인 존속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라고 헨리 리(Henry Lea)는 그의 저서 <중세 종교 재판의 역사>에서 말한다.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 조직인 템플 기사단과, 11세기와 13세기 사이에 유럽을 방랑하면서 그들의 노래 속에 환생의 가르침을 대중화 한 음유 시인들도 카타르와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부른 연가 속에는 현생에서 착하게 살면 내생에는 영적 진보에 적합한 몸으로 태어나게 된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교회의 살벌한 숙청이 피비린내 나는 형국으로 치달으면서, 환생주의 이단자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내생밖에 없었다.



1244년에 알비주의파는 피레네에 있는 그들의 요생에서 마지막 남자, 여자, 어린이까지 모조리 학살당했다.



1274년 리옹의 종교회의와 1439년 플로렌스의 종교회의에서는



영혼이 곧장 천국이나, 연옥 아니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인정하여

유스티니아누스의 파문칙령을 인가해 주었다.



이단적인 저서들은 아주 철저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오리겐이 논쟁을 일으켰던 연설밖에 없다. 그것도 오리겐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 속에 인용된 것이지만! 그나마 거의가 라틴어 번역자인 루피누스에 의해 부드럽게 수정된 것이었다.



루피누스 자신이 인정했듯이



그는 교회를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환생은 대중의 의식에서 떠나갔고, 이 신앙을 현대까지 비밀스럽게 보전하는 책임은 연금술사들이거나 장미 십자회같은 신비주의 그룹들에게 맡겨졌다.







성서의 증언







환생이야말로 "기독교의 잃어버린 끈" (이것은 그노시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신지학회를 창설한 윌리엄 저지가 한 말이다)이라는 확증은 성경 구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서 환생을 믿으라고 공공연하게 외친적은 없지만 환생에 대한 언급은 신구약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 제임스 프리제는 1900년도에 출간된 <신약에서의 환생>이라는 저서에서 "신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진 환생의 교리를 반박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가장 눈에 띄는 언급 중 몇가지는 예수 자신의 말이다. 그는 " 아브라함 이전에 내가 있었다(요한 8:58)"라는 말에서 자신의 전생을 증언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남자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주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가 그를 통해 나타나기 위해서이다(요한 9:1 - 3)" 제자들은 분명히 그 소경에게 전생이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는 그런 생각을 수정하거나 반박하지 않았다. 예수는 제자들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으로 전생-넓은 의미로 환생-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마태 복음 11장에 의하면 예수는



세례 요한을 엘리야의 환생으로 본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나타날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을 언급하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이 바로 성경에서 말한 그 사람이다...



모든 예언자들과 율법은 요한의 때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요한이야말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이다.



귀있는 자는 들으라"









또 복음서의 다른 구절에서 예수는



"엘리야는 이미 왔다" 라고 선언하면서 위의 주장을 강조했다.마태는 "제자들은 그가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한 것이라고 이해했다"라고 지적했다.



세례 요한과 엘리야, 두 사람 다 체격이 크며, 사납고, 열광적인 영감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생김새와 옷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성격적인 특성도 같았다. 사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완벽한 동일성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주장은 힘을 잃는다.



시인인 로버트 그레에브스는 1967년 <플레이보이>지誌 12월호에서 "그러므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결과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환생에 대한 믿음 - 적어도 엘리야의 경우에는 - 을 요구한다는 것을 정직한 신학자라면 인정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인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사람이 무엇을 뿌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7)라고 말한 것은 환생에 대한 강한 암시이다. 왜냐하면 완벽한 계산을 맞추기 위해서는 단 한번의 생애로는 분명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요한 계시록 13장 10절에는 힌두교와 불교 경전에 나오는 업보가 나타나 있다.



"잡혀갈 사람은 잡혀갈 것이고 칼에 맞아 죽을 사람은 칼에 맞아 죽을 것이다." 이 구절은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많은 군인들에게 내생에 보복을 받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야곱과 에서의 환생은 구약과 신약에서 여러 번 언급되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 어떤 선악도 행하지 않았을 때, 신은 로마서 9장 13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미 쓰여진 대로 야곱은 사랑했지만 에서는 미워하였다." 이 성경 구절을 완결짓는 것은 모세의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은 인간과 자연의 순환, 그리고 우주적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거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주에게는 천 년도 지나간 하루 같고 밤의 한 순간에 불과했다.



주께서 사람으 홍수처럼 쓸어 가시니 우리는 잠시 잠을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 같다



(시편 90:3-5)





성경이 환생을 명시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성경 저자들이 "환생을 소화정이나, 혹은 다른 생리현상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가스켈은 <모든 경전과 신화의 사전>에서 말하고 있다.



그노시스교의 복음서인 피스티스 소피아(Pistis Sophia)(지식-지혜라는 뜻으로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준 비밀의 가르침이라고 전해진다)에서는 접근 방식이 더욱 직선적이다.



여기서 예수는



"영혼은 하나의 몸에서 다른 종류의 몸 속으로 부어진다"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쿠아리안 복음서- 19세기에 오하이오주 벨빌르의 목사이며 의사였던 리바이가 아카식 레코드에서 복사했다-는 역사적 계보가 있는 복음서와 같이 경전으로서의 권위는 갖지 못했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전수되어온 이 경전에는 환생에 대한 구절이 있다. 이 복음서에는 예수는 젊은 가수나 음악가들의 노래를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들은 젊지 않다. 천 년이라는 세월도 그들에게 이런 신성한 표현, 이런 순수한 목소리와 창법을 가져다 주기에는 부족하다. 만년 전에 이들은 하모니를 통달했다. 오래전에 그들은 새들의 멜로디를 터득했고 완벽하게 하프를 연주했다. 그리고 다른 과정을 배우기 위해 또 다시 온 것이다 (37장 13 -15)





오늘날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이 비록 환생을 기독교의 교리로 채택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전반적으로 성직자 사회에 환생에 동조하는 흐름이 증가하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이런 우호적인 추세는 19세기 후반 윌리암 알저 목사의 전향에 기인한 것이다.



정열적인 유일신교의 목사로서 <내생의 교리에 대한 비판적 역사>라는 저서에 인생의 절반을 바친 알저는 1860년에 출판된 초판에서 환생을 그럴듯한 망상이라고 무시했다. 그러나 집중적인 연구 끝에 그는 환생론의 장엄함에 압도되어서 1878년에 출판된 마지막 판에서는 환생을 전면적으로 인정했다. 그 이후 다수의 목사들이 환생론에 우호적인 강연을 했다.



전前 영국 감리교 협회의 의장이었던 레슬리 웨더헤드 박사는 1957년 <환생에 관한 사례>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따.





지성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삶이 정의로워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합당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환생이라는 개념이 도움이 될 것인가?.... 만약 육체 속에 있는 동안 치러야 하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면 다시 돌아와서 이 시험을 치러야 하지 않을까?





1979년, 서레이 대학 사회학과에서 영국의 로마 가톨릭 신도들의 태도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놀랍게도 27%의 가톨릭 신자들이 환생을 믿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조셉 크레한 신부가 쓴 환생이라는 제목의 팸플릿(런던의 가톨릭 진리회 발간)을 보면

옛날의 이단이 다시 고개를 든 것에 대하여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크레한은 간단히 다음과 같이 썼다.



".... 우리의 신앙에는 환생론이 설 자리가 없다."



원리주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1982년 9월호 미국잡지 <환생리포트>의 논설을 보면 이렇게 적고 있다.



"원리주의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대중을 조종하기 위해



예전과 똑같이 두려움, 죄의식, 미신이라는 고전적 술책을 쓰고 있다."





오래 묵은 호위병들은 결사적으로 성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저변에 환생이라는 물줄기가 도도히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만약 이 문제를 호의적으로 대처하지 않는다면 커다란 분열이 일어날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신학교수인 파스칼 카플란 박사는 - 그는 1972년 하바드 대학에서 환생에 관한 박사 논문을 쓰려다가 거부당했다. 그 이유는 3세기 이후로는 서구의 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환생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최근에 환생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현재 환생을 인정하는 신부와 수녀, 목사의 조직망이 날로 커지고 있으며, 그들은 환생이 기독교의 정수에 대해 더 깊고 진실한 이해를 가져다 줄 것으로 믿는다고 한다. 또 많은 지지자들이 교회 내에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중 누군가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높여서 기성 교회가 더 이상 그들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면, 오랫동안 억눌려 왔던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 동안에 이 잃어버린 끈은 시대와의 조화 속에서 복위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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