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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자신을 알라 - 영적인 심장 / 마하리쉬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1-07-22 23:02:18
추천수 38
조회수   2,848

제목

그대 자신을 알라 - 영적인 심장 / 마하리쉬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Related Link: http://cafe.naver.com/dorismuseum/672



지바(jiva: 개인적인 영혼)는 영적인 심장 속에 존재합니까?



그렇다.



지바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영적인 심장 속에 머무르며,



깨어있는 시간동안에는 뇌 속에 있는 머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적인 심장은 피를 내보내기 위한 2개의 심방과 2개의 심실, 그리고 살과 근육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아’라는 개념이 생겨나는 곳이 어디인지를 표시하기 위해서 경전에서 영적인 심장의 개념을 사용했었다.



그 개념들은 우리 안에서,



즉 우리 가슴의 중앙에서 오른쪽 어디에선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 ‘자아’는 실제로 정확한 위치가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존재한다.



그러므로 영적인 심장은 자아와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전체, 모든 만물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영적인 수도자로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만물 또는 신체의 요소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심장은 ‘참나’의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 ★ ★



그러면 속박된 자들과 자유로운 자들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까?



영혼의 심장에서 힘의 중심지인 사하스라라(sahasrara)로 이끄는 신비한 이동 경로가 있다.



평범한 자는 영적인 심장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한 채, 머리로만 살아간다.



하지만 갸나시다(jnana siddha)는 영적인 심장 속에서 살아간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을 접했을 때,



그는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과 자신의 실체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내가 지금 막 이야기 했듯이,



평범한 자는 자기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만을 보게 된다.



그는 세상과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자기 자신속의 의미 있는 진리들과 분리시키고,



그들을 도와주는 진리들과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자신들과 분리시켜버린다.



자기 자신의 존재에 관한 진실들을 이미 깨달은 자는



자신의 숨겨진 이면과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사실들마저 자신의 실체임을 알고 있다.



사실상,



그는 모든 본질들과



사물 속에 참나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일시적이고 변덕스러운 모든 사물들에게조차도



영원불변한 참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의심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당신은 ‘영적인 심장’이 진정한 참나처럼 자아 그 자체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영적인 심장은 자아의 중심이다.



하지만 그 자아는 일시적이다.



모든 것들이 그렇듯이 그 자아 또한 모든 중심이 되는 영적인 심장의 도움을 받게 된다.



하지만, 이 자아는 영혼과 물질 사이를 연결해준다.



그것은 사람들이 빠져버린 근본적인 무지의 매듭이다.



적절한 방법으로 이 매듭을 싹둑 싹둑 잘라버렸을 때, 너는 이 중심을 찾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 중심에서 사하스라라로 향한 이동 경로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속박된 자들에게는 이 경로가 닫혀 있지만,



자아의 매듭을 싹둑싹둑 잘라버린 자들에게는 암리타나디(amritanadi)라는 힘의 흐름이 생겨나,



머리의 왕관인 사하스라라를 향해 상승하게 된다.



이것이 수슘나(sushumna)입니까?



그건 아니다.



이것은 해방의 경로이다.



이것은



아트마나디(Atmanadi),



브라흐마나디(Brahmanadi) 또는



암리타나디(Amritanadi)라고 부른다.



이것이 우파니샤드에 언급된 나디이다.



이 경로가 열렸을 때, 그대는 무지한 존재가 되는 것을 멈추게 된다.



그대는 이야기하고, 생각할 때,



또는 어떤 일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사물들을 접하게 될 때조차도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 ★ ★



만약 참나라는 것이 신체라는 고정된 공간 속에 존재한다면,



참나를 무한하고, 완벽한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참나가 육체적인 몸 안의 영적인 심장에 위치한다면, 반드시 육체적인 몸에도 적합하고,



또한 참나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시간적, 공간적 개념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 슈리 라마(Sri Rama)가 바시쉬타(Vasishta)에게 그와 유사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바시쉬타는 두 가지 종류의 심장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모든 것이 충만하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심장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구애받고, 다른 것을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심장이다.



‘신체가 바로 나이다’라는 생각이 사라질 때,



모든 것이 충만한 심장은



그대의 마음속뿐만 아니라



그대가 존재하지 않는 곳까지 자리 잡게 되며,



결국 그것은 그대의 마음속과 그대가 존재하지 않은 곳의 구분을 사라지게 한다.



눈썹사이,



미간이 있는 곳에서 명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맞습니까?



심장의 중심이



그곳에 있을 때,



왜 그곳으로 곧장 이동하지 않고,



대신 다른 중심을 거쳐 가겠는가.



마드라스에서 티루반나말라이로 가기 위해서,



왜 먼저 베나라스를 거친 다음 모든 길로 뻗어나가겠는가?



왜 곧장 가지 않고 말인가?



★ ★ ★



영적인 심장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심장은 영적인 체험 가운데 존재한다.



누군가 심장의 위치에 대해 물어왔을 때,



그는 자신의 신체적인 실체를 받아들여 그렇게 대답했다.



육체적인 몸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말은 이러한 견해로부터 나온 진리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이



그대의 자아와 관련된 심장의 위치이다.



그대는 진정한 의식을 찾으러 간다.



그대는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 자신의 외면에서 그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그대의 안에서



그것을 발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내면을 향해



방향을 잡도록 하여라.

영적인 심장은 깨달음의 중심이며 의식 그 자체이다.





행복이 사람의 본성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외부에서 아무 방해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는 행복하지 않은가?







그는 행복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저는 그렇게 말하기가 조금 주저되고, 의심이 생깁니다.







그대가 겪은 경험이



의심을 없앨 수 있는데도,



왜 그대는 그러한 의심을 지니고 있는가?



그 경험은 조금 애매했습니다.



제가 스스로를 생각할 때,



그것은 여전히 다른 많은 외부의 것들과 산만한 생각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생각을 얻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외부의 것들과 산만한 생각에서



그대의 자아가 자유롭지 못하는 때도 있는가?



자유롭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왜 노력하는가?



그대는 매일 그것들에게서 벗어난 자신을 만나지 않는가?



그것들에서 벗어난 제 자신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깨어있는 상태에 대해 말하고 있구나, 그렇지 않은가?

잠을 자는 동안의 그대의 상태는 어떠한가?

나는 꿈이 있는 잠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의 깨어있는 상태의 사본, 혹은 약한 메아리이다.

나는 꿈이 없는 잠에 주목한다.



꿈이 없는 잠을 잔적은 없는가?



매일 밤 꿈이 없는 잠을 잡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에서,



그대는 외부의 것들과 산만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가?

그대가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 산만한 생각이나 고통에서 잠을 잤다고 느끼며 깨는가?

방해받지 않고 더 없이 좋은 휴식으로 느끼며 잠을 깨지 않는가?

꿈 없이 잠을 자는 동안,



방해받지 않는 행복한 휴식을 누가 즐기는가?

외부의 것들과 산만한 생각이 그 때 그대와 함께 하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대가 외부의 것들과 산만한 생각을 벗어나서 매일 경험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대에게 편안하고 즐거운 것이다.

이보다 그대 참나의 본질적인 성질이 행복이라는 것을 추론하는 데에 더 훌륭한 근거가 있는가?



★ ★ ★



어떨 때 우리는 행복을 느끼지만,

또 다른 때 어떤 것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결국 행복이란 일시적인 것입니까.



왜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오직 몸과 마음으로부터만 나오는 행복을 기대하지는 않았는가?

그대는 행복이 길게 지속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참나를 아는 것밖에 길이 없다.

그때서야 진리는 그대 심장 앞에 햇살처럼 빛날 것이다.

마음도 아무런 문제없이 될 것이고, 참된 행복이 그것에 넘쳐날 것이다.

참나와 행복은 동일한 것이다.



저는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 제 마음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마음에 대한



상대적인 행복과 불행은



영적 진리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기인한다.

사람의 참된 본성은 타고난 행복이다.

행복의 추구는



참나에 대한 무의식적 탐구이다.

결국 그는 그곳에 이미 있었던 것을 찾게 된다.

이 행복, 환희는 끝이 없다.

그것은 영원하다.





저는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찾아 히말라야로 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마두라이에서 250마일을 여행하여 여기에 왔다.

정신적 안식을 얼마나 얻었는가?

그것에 여기에서 히말라야까지의 거리를 곱한 것이,

그대가 그곳에 이르렀을 때 얻게 될 행복의 양이다.

평화가 그대의 진정한 본성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 ★ ★



한번은 라마스와미 필라이가 열쇠를 찾고 있었다.



얼마 후, 그가 그것을 찾았다.



그 열쇠는 항상 그것을 놓아두는 장소에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단지 그가 그것을 놓아두는 그곳을 기억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참나도 어디에나 있다.

진정한 본성에 대해 우리가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계속 찾을 뿐이다.



★ ★ ★



저는 부와 권력과 모든 물질적인 안락함을 갖췄으나, 평화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왜 평화를 원하는가?



왜 지금 그대로 있지 못하는가?



그것은 제가 지금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두통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두통약을 먹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평온히 쉴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질병이 아닌 건강이 우리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평화이다.

그것을 잊고서,



우리는 외부의 근원에서 평화를 찾는다.

그대의 마음을



외부의 대상으로부터 철회하고



내면으로 돌리는 순간,

그대는 진정한 평화를 맛보고 행복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영적인 심장의 위치는 가슴의 오른쪽이다.



왼쪽이 아니다.

의식의 빛은



이 심장에서부터



수슘나(Sushumna)라는 경로를 통해

사하스라라(Sahasrara)로 흘러간다.

이 사하스라라에서 의식은 신체의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게 되며,

그런 다음 세상의 체험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 ★ ★



이미 깨달은 사람들조차



매듭을 잘라 내는 것에 관해



의구심을 갖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매듭은



참나와 신체를 연결해주는 것이다.

신체에 대한 자각은 이러한 연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신체는 물질이고, 참나는 의식이다.



이 둘 사이의 연결은 사유의 능력을 통해 맺어지는 것이다.

마치 눈에 보이는 전선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전기의 흐름이 지나가는 것처럼,

우리 몸속의 다양한 경로들을 통해 의식의 빛이 흘러간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의식의 발산 때문인 것이다.

현자들은



이러한 발산의 중심이



영적인 심장이라고 말한다.

이런 의식이 흘러가는 경로를 수슘나라고 부른다.

또한 그것을 아트마나디(atmanadi), 프라나나디(prana nadi), 그리고 암리타나디(amritanadi)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식들이 몸 전체에 가득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체에 집착하게 되고



신체를 참나라고 생각하게 되며,



세상을 자기 자신과 분리시켜 바라보게 된다.



마치



달구어진 쇠공이



불로 만들어진 공으로 보이는 것처럼,



참나탐구를 통해 참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체는 눈부시게 빛난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와 관련된 보이지 않는 경향들은 파괴된다.

신체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기 때문에



행위자에 대한 자각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매듭을 잘라낸 사람은



절대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

그러한 상태가 최상의 힘을 발휘하는 것 중의 하나이며, 평화이다.

깨닫지 못한 자들이 명칭과 형태에 얽매이는 것과는 반대로,

자신의 내면, 외면, 어느 곳에서든지



참나만이 빛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그 매듭을 잘라낸다.





참나를 깨닫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로



기억이고,



생각하는 습관,



선입견 들이다.



어떻게 이런 방해들을 버릴 수 있을까요?



다음의 방법으로



명상에 의해 참나를 살펴라.

오직 마음이 있는 근원에



모든 생각을 따르게 하라.

생각이 계속되게 결코 두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꾸 출발 지점에 되돌아가면 마음은 정지하여 죽어버린다.

끊임 없이



“나는 누구인가?”하는 질문으로 되돌아가라.

모든 것의 근원이 남을 때까지만



모든 것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나서 항상 현재 속에서만 살아라.

마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과거며 미래도 없다.



어떤 명상이 저에게 도움이 됩니까?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해서도



명상을 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된다.

당신은 주제와 대상은 하나임을 깨우치기 위해 배워야만 한다.

그 대상을 명상함에 있어



당신은 조화 감각을 파괴하게 되고 이중성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 구체적이건 추상적이건 실제의 당신에 대해서만 명상하라.

당신은 발견할 것이다.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

각 개인의 경험을 말해 주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저절로 드러난다.

계속 그 일을 하라.



* * *



그 모두는 마지막 탐구에서 하나로 보여지는 게 아닙니까?



당신은 마지막 탐구에서 모두 하나로 보이거나 생각되고 혹은 행동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두 가지 개념을 지닌다.

보여지는 것들과

보고 생각하고 행하며 ‘나’를 말하는 나.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이고 진실하며 중요한가?

명백하게 보는 자이다.

왜냐하면 보여지는 것은 보는 자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의 주의를 ‘나’의 근원인 보는 자에게 돌려서 그것을 깨달아라.

이것이 진짜 할 일이다.

이제까지 당신은 주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해 공부해 왔다.

이제



‘나’라는



단어가 상징하는



진실성이 무엇인지 탐구하라.

‘나’라는



표현의 근원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하라.

그것이 참나이며 모든 존재들의 참나이다.





옴, 나모 바가바테 슈리 라마나야!



[출처] 그대 자신을 알라 - 영적인 심장 (무상유가탄트라) |작성자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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