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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디오니시우스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0-11-29 19:57:48
추천수 31
조회수   2,662

제목

위 디오니시우스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위 디오니시우스

이서하 옮김



제 1장



하나님의 어둠은 무엇인가?





1. 삼위일체시여!

어떤 존재보다도, 어떤 신보다도,

어떤 선보다도 높으신 분이시여!

하늘의 지혜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하시는 분이시여!

무지와 빛을 넘어

신비한 성서의 가장 드높은 봉우리로

저희를 이끄소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가

숨겨진 침묵의 눈부신 어둠 속에서

단순하고 절대적이고 변치 않은 채 있나이다.

가장 깊은 그림자 가운데에서, 그 신비는

가장 분명히 드러난 것 위에

넘치는 빛을 쏟아 붓나이다.

완전히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 가운데에서, 그 신비는

모든 아름다움을 초월한 보화로

우리의 눈 먼 마음을 가득 채우나이다.





내가 이를 위해 기도하나니, 나의 친구 디모데여, 네가 신비한 일들을 보려고 할 때 내가 네게 하는 조언은 이것이다. 즉, 네가 인식하고 이해한 모든 것과, 인식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과,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버리고, 너의 이해력에 의지하지도 말고, 모든 존재와 앎을 넘어 계신 분과 하나 되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너 자신과 모든 것을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포기하고, 모든 것을 버려 모든 것에서 자유로와지면, 너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넘어선 하나님의 그림자의 빛살에게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the ray of the divine shadow which is above everything that is. 다음 단락의 “그 그림자들을 자신의 숨어 있는 장소로 삼으신 분”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여기서 “그림자”란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 야콥 뵈메의 표현을 빌리면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속에 숨어 계신다. “그림자의 빛살”이란 표현에서 “빛살”(ray)이란 그러한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 즉 피조물을 넘어선 하나님의 본질에 다가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단락 3의 “풍성하게 흐르는 빛살을 지닌 순수한 빛들”(the many lights, pure and with rays streaming abundantly)이라는 말에서 “빛”이라는 말과 함께 이 “빛살”이라는 단어를 다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빛들”은 모두 하나님의 본질을 나타내는 어떤 특성들을 표현하는 상징이고 “빛살”은 다시 그 “빛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빛”이나 “빛살”이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역주). 디모데에 대한 이 조언은 모세가 시나이 산을 올라간 일에 대한 특별한 설명(Vanneste, Le Mystère de Dieu, pp. 48f.)을 소개하며, 또 인식할 수 있는 것들(제42장과 위계에 관한 글들)과 지성적인 것들(제5장)까지도 넘어서는 상승을 소개한다(영역자 주).



2.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무지한 자들, 즉 세상 일들에 사로잡힌 자들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라. 그들은 개별적인 존재들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지성적인 근원에 의해 그 그림자를 숨어 있는 장소로 삼으신 분 시편 18:11.

2. 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거룩한 일들에 입문하는 것이 그런 자들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가장 낮은 질서에 속한 존재들에게서 끌어낸 말로 만유의 초월적인 원인을 묘사하며, 그 원인이 자신들이 만들어낸 불경하고 다양한 형상들 the godless and multiformed shapes. 이는 “시간과 공간에 속한 개념“을 말하 는 것으로, 궁극의 원인을 그런 개념이나 말로 표현하여 그것을 절대화하는 자들 의 오류를 비판한 것이다(역주).

2. 보다 결코 뛰어나지 않다고 생각하는 훨씬 더 무지한 자들에 대해서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만유의 원인에 대하여 실제로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이다. 그것은 만유의 원인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가정하고, 우리가 존재에 관해 하는 모든 주장을 그것에게 돌려야 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원인은 모든 존재를 초월하므로, 우리는 이 모든 주장을 부정해야 한다. 그런데 부정이 단순히 긍정의 반대라고 결론지어서는 안 되며, 만유의 원인은 이것보다 훨씬 먼저이고, 모든 박탈을 넘어서고, 모든 부정을 넘어서며, 모든 주장을 넘어선다고 결론지어야 한다. Now we should not conclude that the negations are simply the opposites of the affirmations, but rather that the cause of all is considerably prior to this, beyond privations, beyond every denial, beyond every assertion. 이 구절은 위 디오니시우스에게서 시작된 이른 바 “부정신학”(the negative theology)의 개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중요한 구절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긍정”의 반대가 아니라 “부정까지도 궁극적으로 부정하는 철저한 부정”이다. 여기서 “박탈”(privations)이란 “부정”의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에게는 어떤 정의나 개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역주).

2.

3. 적어도 이것은 복되신 바르돌로뮤(Bartholomew)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후에 사람들은 다른 사도들처럼 신약성서의 바르돌로뮤(우리말 성서에서는 바돌로매-역주)(마태 10:3, 마가 3:18, 누가 6:14, 사도행전 1:13)께서 몇 권의 위경을 쓴 것으로 믿었다.

3.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거대면서도 작고, 복음은 광대하면서도 한정된 것이라고 말한다. 나에게는 그가 이 점에서 아주 빈틈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만유의 선한 원인이 웅변적이면서 동시에 침묵한다는 것, 즉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해의 말도 이해의 행위도 없나니, 이는 그것이 이 모든 것을 넘어선 차원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관통하고, 모든 거룩한 상승의 정점을 넘어서고, 하늘에서 오는 모든 거룩한 빛과, 모든 목소리와 모든 말씀을 버리고, 성서가 주장하듯이 출애급기20:21. 비교, 출애급기 19장.

3. 만유를 초월하신 분이 계시는 어둠 속에 뛰어든 자들에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저 복된 모세가 먼저 정화하고 나서, 정화하지 않은 자들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니다. 모든 정화가 끝나면, 그는 여러 음색의 나팔소리를 듣는다. 그는 풍요롭게 흐르는 빛살을 지닌 순수한 여러 빛들 the many lights, pure and with rays streaming abundantly. 여기에서 “빛”과 “빛살”(rays)은 모두 하나님의 본질을 표현하는 상징이지만, 그 근원 자체를 말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는 모세처럼 정화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 현상계의 다중성(multiplicity)을 넘어서 경험하는 신성의 특성을 나타낸다. 다음 구절에서 “그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거하시는 곳을 관상한다”라고 한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초월적인 궁극의 원인을 오히려 “빛을 완전히 넘어선 어둠”(darkness so far above light)(제2장)라고 표현한다(역주).

3. 을 본다. 그 때 그는 무리에게서 떨어져서, 선택된 사제들과 더불어, 거룩한 상승의 정점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자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분이 아니라 그 분이 거하시는 곳을 관상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것은 몸이나 맘의 눈으로 인식한 모든 것 중 가장 거룩하고 가장 높은 것이라 할지라도 초월적이신 분 아래에 있는 만유의 원리 the rationale which presupposes all that lies below the Transcendent One. 직역하면, “초월적인 분 아래에 있는 만유를 전제하는 근본적 원리”. 이 말은 인 간의 몸과 맘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무리 지고한 것일지라도 초월자의 본질 자체 가 아니라 단지 만유의 근본이 되는 원리일 뿐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 의 마음으로 추론해낸 만유의 근본적인 원리가 초월자 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역주).

3. 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상상할 수 없는 현존이 나타나, 적어도 마음이 올라갈 수 있는 거룩한 곳들 중 가장 높은 곳들을 걷는다. 그러나 다음에 그[모세]는 그것들, 즉 보고 보이는 것을 벗어나, 참으로 신비한 무지의 어둠(darkness of unknowing) 이 “무지”라는 말은 물론 단순히 “알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앎을 넘어섬“을 뜻한다. 즉, ”앎으로 이를 수 없음“이다. 니콜라스 쿠자누스(Nicolas Cusanus)와 여러 신비주의자들이 같은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역주). 이 표현은 아마도 14세기의 익명의 영국 작가가 쓴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ed. James, Walsh)(New York:Paulist Press, 1981)이라는 책으로 인해 “무지의 구름”이라는 표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영역자 주).

3. 속으로 뛰어든다. 여기서 그는 마음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잡을 수 없고 보이지 않는 것에 감싸여, 모든 것을 넘어 계신 분께 완전하게 속하게 된다. 여기서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상태에서, 모든 앎이 활동을 멈춘 상태에서 도무지 알 수 없는 분과 지극하게 합일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게 됨으로써 마음을 넘어서서 알게 된다. 이 구절은 부정신학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긍정적인 표현, 즉 궁극의 본질을 가 장 분명하게 드러낸 표현이다. 참고로 영어원문은 다음과 같다. renouncing allthat the mind may conceive, wrapped entirely in the intangible and the invisible, he belongs completely to him who is beyond everything. Here, being neither oneself nor someone else, one is supremely united to the completely unknown by an inactivity of all knowledge, and knows beyond the mind by knowing nothing.

3.





제 2장

만유를 넘어 계시며 만유의 원인이신 분과

어떻게 합일하며, 어떻게 찬양해야 하는가?





나는 우리가 빛을 완전히 넘어선 이 어둠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한다! 만일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통찰력과 앎을 결여하여, 모든 통찰과 앎을 넘어서 있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것은 참으로 볼 수 있고 알 수 있을 것이니, 초월적인 분은 초월적인 방법으로, 즉 만유를 부정함을 통해서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조각상을 새기기 시작한 조각가와 같을 것이다. 그들은 숨어 있는 형상의 순수한 모습이 나타나도록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데, 그들은 단지 이 제거하는 여기서 “제거하는”이라는 말(aphairesis)은 “부정하는”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

행위를 통해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우리가 어떤 주장을 찬양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부정을 찬양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주장을 할 때, 우리는 첫 번째 것으로 시작하여 중간의 말들을 통해 마지막 말로 내려간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마지막 것들로부터 가장 처음의 것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모든 것을 부정해 나가나니, 이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서 앎에 사로잡힌 모든 자들에게 스스로 숨어 있는 저 알 수 없음(unknowing)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요, 존재들 가운데 있는 모든 빛에게서 숨어 있는 저 어둠을 존재를 넘어서 보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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