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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데가르트 - 최초의 수녀원장 / 하늘이 내린 환상을 보는 아이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0-11-05 20:31:19
추천수 20
조회수   2,655

제목

힐데가르트 - 최초의 수녀원장 / 하늘이 내린 환상을 보는 아이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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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부터 매우 밝은 빛이 내 침상에 쏟아져 내렸는데,



그 빛은 마치 타 들어가지는 않으면서 빛나기만 하는 불꽃같았다.





그 불꽃은 태양처럼 내 심장과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갑자기 나는 시편과 복음서, 구약과 신약의 여러 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http://cafe.naver.com/growingsoul/1527













나이 42세가 되었을 때 독일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수녀회의 원장 힐데가르트는 위와 같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비전(vision), 즉 하늘에서 내려준 환상을 세상에 알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날 이후 평범한 수녀에서 예술가, 작가, 카운셀러, 언어학자, 자연학자, 과학자, 철학자, 의사, 약초학자, 시인, 운동가, 예언자, 작곡가로 거듭났다.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분야에서 동시에 탁월한 업적을 남기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이러한 업적들을 자기의 것으로 하지 않고 겸손하게 신의 영역으로 돌렸다. 신이 자신의 몸을 악기처럼 연주해 그 뜻을 현현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여성을 억압하던 중세시대에 여성이 재능을 발휘해 세상의 주목을 받아 비난 당하는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그녀 스스로도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재능을 그렇게 여겼을 지도 모른다.







힐데가르트는 1098년 라인헤쎈지역의 베르메스하임에서 작위가 없는 귀족 아버지 헬데베르트와 어머니 맥틸드의 열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세 살 무렵에는 하늘에서 내려주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의 부모는 중세 당시 많은 부모들이 그러했듯 열 번째 아이 힐데가르트를 십일조로 신에게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 맹세에 따라 그녀는 여덟 살에 디지보덴베르크에서 은거하며 수도하던 유타에게 보내졌다. 한편에서는 어린 시절 몸이 너무 약해 신의 뜻을 따라 수도해야만 오래 살 수 있다고 하여 그렇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20대였던 은수사 유타는 수폰하임 백작의 여동생으로 힐데가르트는 다른 한 명의 또래 여자아이와 함께 유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힐데가르트는 유타에게서 종교적인 가르침 외에 포괄적인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타 자신이 귀족계급 출신이었으므로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었을 것이고 이는 그녀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전해졌다. 거기에다 당시 베네딕트 수도원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다양한 지식을 접할 기회가 풍부했다. 힐데가르트는 중세시대에 여자라는 불리한 위치에서도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받았고 이는 그녀가 40대 이후 쏟아낸 업적들의 밑거름이 되었다.







1112년에서 1115년 사이에 힐데가르트는 평생 수도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밤베르크의 주교 오토의 집전으로 베네딕트 수도원에 입회, 수녀가 되었다. 그 시대 수녀들은 남성수도원에 부속된 여성수도원에서 살았는데 그녀가 들어간 디지보덴베르크의 수도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수도원의 원장은 유타가 맡았다. 이시기 힐데가르트는 하늘에서 내린 환영을 끊임없이 보았지만 스승 유타의 충고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녀의 환영이 기존 종교조직으로부터 배척당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그녀는 물론 수녀회 전체를 난처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조치였다. 힐데가르트는 38세에 유타가 죽은 뒤 수녀들의 ‘만장일치’로 10여명으로 늘어난 공동체의 후임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계시를 세상에 알리다





1141년 힐데가르트는 스스로 정확히 밝혔듯이 42세 7개월이 되었을 때 하늘의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동안 보아온 비전과 그 비전을 통해 깨달은 것을 숨기지 말고 세상에 알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실제로 그녀가 받은 계시이기도 했을 것이고, 수녀원장으로서 스스로의 일에 책임질 각오가 된 본인의 결정이었을 수도 있다. 힐데가르트는 처음에는 이 계시를 의심하고 따르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계시를 피하면 피할수록 소명은 더욱 강렬히 그녀를 사로잡았고, 결국 힐데가르트는 [쉬비아스(길의 조명)] 집필을 시작하게 됐다. 그녀는 10년에 걸쳐 이 책을 완성한 뒤 망설였다. 그만큼 중세시대 여성이, 특히나 신에게 복종하고 겸양으로 숨어 살며 수도를 하겠다고 맹세한 수녀가 함부로 세상 앞에 나서는 일이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쉬비아스]를 교회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끌레르보의 베른하르트에게 보이고 자신의 작업이 옳은 것인지 자문을 청했다. 그녀가 쓴 글들은 당시 가톨릭 조직과 세상에 일침을 가하는 내용이 많아 자칫하면 이단으로 몰릴 수 있기에 모든 절차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베른하르트는 힐데가르트의 글을 교황 에우제니우스 3세에게 보여 주었고, 교황은 트리어 회의에서 그녀의 책을 검사한 뒤 마침내 그녀의 비전과 글이 정당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힐데가르트를 ‘신을 팔아먹는 사기꾼’이 아니라 ‘하늘의 비전을 보는 자’로 공식 인정하고 더 많은 계시를 세상에 알릴 것을 독려하였다. 이때부터 힐데가르트는 세상에 나와 자신이 얻게 된 재능을 아낌없이 풀어놓았다. 그녀는 [쉬비아스] 외에 두 권의 신학서를 저술했다. 또 수녀원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약초와 광물질(보석) 등을 이용한 치료법을 소개하였고 신을 찬미하는 시를 쓰고 음악을 작곡하였다. 이로써 힐데가르트는 현전하는 서양음악가 중 이름이 알려진 최초의 작곡자가 되었으며 그 음악은 현재까지도 연주되고 있다. 그녀의 약초학은 오늘날까지 서양에서 널리 사용하는 민간요법의 기초가 되었다.









이외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신의 예언을 알리는 신비주의자이자 카운슬러였고 신과 우주, 인간이 유기적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된다는 세계관을 설파하는 자연학자이기도 하였다. 이는 서양철학이 자연을 극복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반대되는 것으로 동양의 자연친화사상과 일맥상통하기도 한다. 21세기 자연과 환경문제가 대두된 이즈음 힐데가르트의 이러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다시 각광받고 있다. 이것은 투쟁과 승리보다는 포용과 보호, 협조를 중시하는 여성주의적 생각에서 나올 수 있는 사상이기도 했다.









힐데가르트는 라틴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은 라틴어에 능한 수사를 통해 책으로 만들어졌고 설명이 더 필요한 부분은 그녀가 직접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그 그림들은 계시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도 있지만 그녀가 가진 신-인간-자연 합일의 세계관을 표현한 일종의 만다라와 같은 그림도 있다. 이 그림 속에서 인간은 세계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조화하고 포용하는 존재로 표현되었다. 또한 라틴어에 능숙하지 않은 이유로 독일어와 라틴어가 습합된 문자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훗날 르네상스시대에 꽃 핀 인간중심의 학문과 성경을 각국의 나라말로 옮기는 작업의 효시가 됐다.











수녀가 독자적으로 만든 최초의 수녀원





중세시대 여성의 지위는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가톨릭 교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녀는 어디까지나 남성 성직자의 보조역할이었으며, 수도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수녀원은 수도원의 부속기관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어느 날 또 한번 신의 계시를 받고 그녀가 속한 디지보덴베르크의 베네딕트 수도원을 떠나 수녀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들려고 했다. 그녀의 이러한 계획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획기적인 것이었다. 수녀들로만 구성되고 수녀들의 힘만으로 꾸려가는 수녀원은 수녀들이 직접 경제력을 가지고 가톨릭 교단에서 그 입지를 당당히 굳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자인 신부를 거치지 않고도 바로 신을 영접할 자격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거기에다 예언자로서 힐데가르트의 명성에 힘입어 귀족과 왕들로부터 많은 기부를 받았던 디지보덴베르크 수도원은 그녀의 독립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시대를 넘어서는 자신의 시도를 방해하려는 교단에 굴하지 않았다. 예언자로서 얻은 명성과 확보된 경제력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 오는 많은 수녀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수녀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성 루페르트가 그 어머니와 신앙의 중심지를 만들었던 나에강과 라인강이 연결되는 곳으로 위치를 정했다. 여러 후원자의 후견으로 1147년부터 1151년 사이에 이 곳 루페르츠베르크로 수녀원을 옮겼으며 이는 역사상 최초의 수녀원으로 기록됐다. 수녀들이 남성 수도사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수녀원을 세운 획기적인 이 일로 그녀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해마다 그녀를 찾는 수녀들이 늘어났다. 결국 힐데가르트는 라인강 건너편 아이빙엔 지역에 새로운 수녀원을 추가로 지었고 양쪽 수녀원의 원장을 겸임했다. 이때부터 그녀에게는 힐데가르트 폰 빙엔 즉 ‘빙엔의 힐데가르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세시대를 극복한 여인







세상을 향한 힐데가르트의 움직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에 교회당의 가장 안쪽, 사람들과 접하지 않은 장소에서 수도를 해야 하는 수녀의 생활에 만족하지 않았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전하는 하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을 직접 찾아 다녔다. 그녀는 독일 전역을 네 차례나 돌며 설교여행을 했다. 이것은 중세시대 수녀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신의 계시를 받은 자의 권리로, 자신의 영민함으로, 정치적인 신중함으로 여성, 특히 수녀들에게 가해진 모든 제약을 극복하고 당당히 세상 앞에 나섰다.







힐데가르트의 활동은 중세시대 억압된 여성들에게는 새로운 시대를 기약하는 신선한 바람이었고, 그녀가 남긴 업적은 서양의 학문과 예술의 역사에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힐데가르트의 정열적인 활동은 그녀의 유명세와 업적을 시기하는 남성 성직자들에 의해 한때 억압받기도 했다. 그녀가 쓴 시와 작곡한 음악들을 교회에서 연주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이 일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투쟁 끝에 죽기 직전 마침내 자신의 음악이 교단 내에서 인정받도록 만들었다.





힐데가르트의 예술과 학문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한때는 묻히기도 하고 또 한때는 재발견되기도 했지만 꾸준히 교회사뿐만 아니라 서양사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20세기 말 환경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업적은 재조명 됐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여성의 지위가 미미하던 서양 중세에 자신의 탁월함으로 시대를 극복하고 그 이름을 남겼다. 그러고 오늘날 까지도 예술과 생태학분야에서 각광받고 있다. 힐데가르트는 공식적으로는 시성된 적은 없지만 1664년부터 독일 가톨릭교단에서는 그녀의 사망일을 축일로 기리고 있으며, 1940년에는 로마 교황청도 이 축일을 인정하였다.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힐데가르트를 성 힐데가르트라고도 부른다.







글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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