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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보다 나를 찾아 떠난 목사 / 고진하 목사
시사종교 > 상세보기 | 2010-10-26 20:46:08
추천수 15
조회수   2,481

제목

하나님보다 나를 찾아 떠난 목사 / 고진하 목사

글쓴이

김재용 [가입일자 : 2000-05-20]
내용
치악산 영성시인 고진하 목사

틈틈이 인도 순례, 우파니샤드 입문서 내기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 있다’는 스승 만나 ‘비상’











강원도 원주에서 치악산 기슭으로 올라가다보면 ‘살구꽃 언덕’이 나온다. 행구동이다. 고진하(56) 목사가 사는 곳은 치악산 계곡과 맞닿은 마당에 잔디가 깔려 있고, 봄꽃 잔치가 한창인 2층집이다. 표정만이 아니라 삶터도 인간의 영혼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그다운 집이요, 그다운 풍경이다.



그는 개신교 목사이면서도 목사만은 아니다.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하고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등 5권의 시집을 낸 영성 시인이자 숭실대 문예창작과와 모교 감신대에서 강의하는 교수이다. 그 뿐 아니라 틈나는대로 인도를 여행하는 순례자이기도 하다. 지난 2002년부터 인도를 오가던 그가 최근 ‘고진하의 우파니샤드 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신들의 나라, 인간의 땅>(비채 펴냄)을 내놓았다. 영성시인다운 감각과 적절한 비유들이 곁들여진 이 순례기는 일반 대중들이 우파니샤드에 다가서기에 가장 적절한 책으로 손꼽을만하다.



우파니샤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전해주는 최고의 영적 지혜서다. 우파니샤드는 ‘가까이’(우파)+‘아래로’(니)+‘앉는다’(샤드)의 합성어로, 스승이 아끼는 제자를 가까이 앉히고 은밀히 전해주는 지혜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는 내 생의 위안이자 죽음에 이르기까지 위안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며 늘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 쇼펜하우어뿐만 아니라 예이츠, 막스 뮐러, 데이비드 흄 등 서양의 위대한 작가와 철학자들이 앞 다투어 <우파니샤드>를 연구하고 번역했다.



딸이 반려자로 데려온 무슬림 청년에 “한눈에 반해”



저자가 목사임에도 그는 ‘신(하나님)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당시 그의 절친한 친구조차 “인도에 미쳤군. 이젠 기독교의 울타리도 벗어나 훨훨 날아가려는 모양이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친구의 말처럼 기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려는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가 인도에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실은 그는 원할 때는 무엇에나 미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제도 종교의 좁은 틀로 가둘 수 없는 그의 영혼은 감신대 재학시절 변선환 교수와 만나면서부터 비상을 준비했는지 모른다. 변선환은 동서신학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신학자로 손꼽히면서도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유일한 진리성’을 부인했다는 누명을 받고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 학장직, 교수직, 신자직까지 박탈당한 그의 스승이었다. 고 목사는 이 책의 첫페이지에서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 광활한 영성의 바다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유영하며 살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고 변선환 선생님께 바칩니다’라고 썼다.



스승에게 고백한 대로 그는 강원도 영월의 촌사람답게 강릉 사천제일교회에서 8년, 이곳 치악산에서 9년째 살고 인도까지 오가며 자유롭게 유영했다. 그의 자유로움은 그 하나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아내 권기화씨는 히말라야 요가를 해 깨어있으면서도 고요하며 멋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요가수행자다. 또 권씨가 요가를 배우던 인도 리시케시로 따라나섰던 딸은 3년 전 타고르가 세운 인도의 산티니케탄의 비스바바라티대학으로 조각공부를 하러갔다. 그 딸이 유학중 일생의 반려자감으로 택한 남자친구는 이란에서 온 무슬림 화가였다. 인도 여행중 바라나시로 딸이 데려온 무슬림 청년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는 그 딸의 아버지에게 청년은 자신은 수피라고 했다. 무슬림 중에도 수피는 다른 종교를 거부하지 않으며 신성과 영성을 추구한다. 그 수피 청년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슴으로 안은 듯한 눈빛의 예수 그림을 그에게 바쳤다. 치악산 그의 집 거실엔 무슬림 청년이 그린 예수 그림이 있다.



고 목사는 인도의 수많은 사원과 거리에서, 바람처럼 떠도는 음유시인인 바울들과 탁발 수행자들과 만나면서 점차 고요한 내면 속으로 들어갔다. 안내자는 물론 그가 가슴으로 안았던 우파니샤드였다. 마침내 “그대 안에 다 있는데, 왜 바깥 풍경만 기웃거리느냐?”는 내면의 음성을 느낀다. 그러면서 시인답게 스스로에게 묻는다.

 

 보물은 네 안에 있는데,

 왜 바깥에서 보물을 찾으려 그토록 애썼는가.

 왜 나지도 죽지도 않는

 네 존재의 항아리에 담긴

 영원한 생명의 황금빛 보물을 캐내려 하지 않았는가.

 눈만 뜨면 나고 병들고 늙고 죽는

 윤회의 고리를 보면서도

 왜 환의 술에 취해

 네 자신의 참된 자아로 깨어나지 못하는가….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로



고 목사는 그런 물음에 대해 “네가 그것이다”, 즉 “네가 곧 아트만(참자아)”이라는 자각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는 “여러 강이 끝내 하나의 바다에 이르는 것처럼 내가 의탁해온 기독교라는 강줄기가 당도해야 할 궁극의 바다가 어디인지를! 나는 <우파니샤드>를 읽으며 영성의 광활한 바다에 진입하는 희열을 맛보았고, 내가 믿어온 하느님이 바로 내 존재의 심연에 닻을 내리고 계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우파니샤드의 진리를 통해 천주교신자이면서 동학의 생명사상가였던 장일순 선생을 생전에 만났던 것보다 더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느끼게 됐고, 마침내 자신의 참모습을 자각하게 됐다.



그는 기독교에 큰 광명을 비춰준 영성가로 어거스틴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꼽는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원죄론만으로는 동양세계와 대화하기 어렵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는 지하의 광맥을 통해 기독교 영성이 동양의 종교들과 회통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우파니샤드를 경험한 뒤 성경에도 표현이 다른 같은 내용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가 요즘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7장이다.



‘아버지여,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길어낼수록 더욱 더 풍성한 영성의 샘물은 우파니샤드를 통해 나왔다. 우파니샤드 중의 우파니샤드라 불리는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태양신 수리아를 ‘생명의 원리’(진리·다르마)로 본다고 한다. 만물을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원리가 최초로 태양에 점화되었다는 것이다. 고 목사는 내가 내 안에 참자아가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자기의 본성을 회복하여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인간, 즉 신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나온 책 한 장이 밝고 맑게 빛난다.











변변한 교회와 신자 하나 없지만 그래도 더욱 더



그러면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이란 무엇일까. <바가바드 기타>를 주석한 비노바 바베는 태양이 간직하고 있는 참 모습을 ‘욕망 없는 활동’이라고 말한다.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은 ‘나는 저 어둠을 살라버릴 거야. 어두운 지상에 빛을 비춰 새들을 지저귀게 하고, 꽃을 피어나게 하고, 사람들이 즐겁게 일하도록 할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은 그저 하늘에 떠올라 그 빛으로 세상을 비출 뿐이다. 우리는 태양이 활동한다고 말하지만, 태양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만일 우리가 캄캄한 어둠을 몰아내고, 지상에 빛을 비춰 만물을 자라게 하고, 사람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태양을 두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말한다면, 태양은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빛은 나의 본성일 뿐이네. 꽃이나 새를 보게. 향기를 내뿜는 것이 이 꽃의 본성이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새의 본성이듯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게 나의 본성일세. 나는 내가 빛을 발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다네. 나에겐 내 존재 자체가 빛일 뿐이네.



그렇다. 빛을 비추는 건 태양의 자연스런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자기 본성에서 멀어진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참자아를 망각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선을 행할 때도 행위 뒤의 결과를 생각한다. 은행에 예치한 돈이 있으면 돌아올 이자를 계산하듯이, 우리의 행위가 가져올 열매를 기대한다는 말이다.









사랑할 때도 손익을 따지고 남을 도울 때도 돌아올 보상을 계산한다. 행위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랑은 소유욕에 불과하다. 순수성을 상실한 자선은 자기 이름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욕심에 불과할 뿐이다. 크리슈나는 이처럼 행위의 순수성을 상실한 오늘의 아르주나들에게 충고한다.

 

 행위의 결과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말라.

 언제나 만족해하며

 철저하게 독립적이 되라.

 그러면 비록

 이 행위의 한가운데 있다고 해도

 그대는 행위하지 않는 사람이다.

 <바가바드 기타>



변변한 교회와 신자 하나 없지만 그래도 더욱 더 예술세계에도 마음이 열린 그는 “화가나 음악가나 시인이 아니면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했던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암 브레이크의 말대로 더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깨어나고 있다. 그의 아내 또한 90이 넘은 시어머니와 돈을 많이 벌어본 적이 없는 남편과 살면서도 “올해는 된장 네말과 고추장 두말을 담가두니 손님이 와도 걱정이 없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됐다”며 평화로운 미소를 짓는다.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준 게 하나도 아깝지 않은 하늘과 달과 치악산과 계곡물과 꽃들의 미소가 눈부시다.



치악산/글·사진 조현 종교명상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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