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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충무공
자유자료실 > 상세보기 | 2014-07-29 20:04:11
추천수 29
조회수   2,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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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오세영 [가입일자 : ]

제목

영화 명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충무공
내용

이제 판옥선 이야기가 남았군요. 

이전 이야기를 못 보신 분은 아래 링크 클릭하시면 제 블로그로 이동합니다. 

영화 명량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 (1) - 수군의 군량 이야기

영화 명량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 (2) - 왜장 갑옷과 투구이야기

이번 이야기는 임진장초 등을 인용하느라 내용이 길고 딱딱합니다. 

그래서 결론만 간단하게 요약하면 충무공은 우리가 알던 것과 달리 군율을 엄격하게 적용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수군병력을 충원했습니다. 

대기근에 전염병까지 돌면서 막대한 병력손실을 입었고 탈영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충무공은 무자비한 징집으로 수군전력을 보존했습니다. 

1. 탈영병은 처벌했고 탈영한 자의 친인척을 대신 징집했습니다.
2. 육군과 명군의 징집에 맞서며 수군의 자원을 지켜냈습니다.
3. 의병과 승병을 대거 합류시켰습니다.
4. 피난민을 대거 징집했습니다.
5. 모병담당 관리를 문책했습니다. 
6. 정유재란 직전 조정의 정책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 충무공께서 탈영병을 냉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길고 딱딱한 내용이지만 이번 기회에 시간내서 충무공의 임진장초 기록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명량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 (3) - 수군의 역병과 충원 이야기

지난 이야기에서 전국이 전화를 입어 황폐해지면서 굶어 죽는 사람이 지천이고 아이를 잡아먹는 일이 많았다는 내용을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피해가 덜했던 전라도 지역의 수군은 둔전제(국가소유의 집단농장)를 실시해서 군량형편이 그나마 나았지만 1593~1595년의 대기근을 겪고 중앙정부, 명군, 육군과 군량징발에 시달리면서 심각한 군량부족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대기근에는 전염병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시체가 곳곳에서 썩으면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굶주려 쓰러지기 직전인 피난민과 병사는 병에 걸리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1593년 봄에는 경상우병사 김면, 우도관찰사 김성일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조선수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충무공께서도 의원을 화급히 파견해달라는 장계를 올립니다.

 

삼가 갖추어 아뢰옵니다.

3도의 수군들이 한 진중에 모여 있으므로 봄부터 여름동안 전염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약물을 많이 준비하여 백방을 치료를 하였어도 효력을 본 사람은 매우 적고 사망한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무고한 군사와 백성들이 나날이 점점 줄어들어서 허다한 전선을 운용하기 어렵게 되었기에, 급한 때를 당하여 참으로 민망스럽고 걱정이 됩니다.
조정에서는 충분히 참작하여 유능한 의원을 특명으로 내려 보내어 구호하게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593년 8월 10일에 올린 ‘왜군의 정세를 아뢰는 계본’에는 수군에 전염병이 퍼졌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대개 수군들은 먼 바다에 진을 친지 벌써 5개월이 되어 군정이 풀어지고 예민한 기질도 꺾였는데, 전염병이 크게 번졌습니다.

진중의 군졸들이 태반이나 전염되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으며, 더구나 군량이 부족하여 계속 굶게 되고 굶던 끝에 병이 나면 반드시 죽게 되는지라, 군사의 정원은 매일 계속해서 줄어지니 다시 보충할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신이 거느린 수군만을 헤아려 보아도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원래의 수가 6200여 명중에 작년과 금년에 전사한 사람의 수와 2ㆍ3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병사자가 600여명이나 되는데, 무릇 이들 사망자는 모두 건강하고 활을 자 쏘며 배도 잘 부리는 토병과 보자기들이오며, 겨우 남아있는 군졸들은 조석으로 먹는 것이 불과 2ㆍ3홉이라, 궁색하고 고달픔이 극도에 달하여 활을 당기고 노를 젓기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습니다.

당장 대적과 대치한 이때, 궁색한 정세가 여기에까지 이르러 민망하고 걱정되는 사연을 재삼 도원수와 순찰사 등에게 보고하여 순천ㆍ낙안ㆍ보성ㆍ홍야 등 고을의 군량 680여 석을 지난 6월에 실어다가 고루 다 나누어 먹였습니다.




충무공과 조선수군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임진장초와 난중일기입니다. 임진장초는 국보 76호로, 조정에 올린 장계를 다른 사람이 따로 기록한 것입니다. 비록 충무공의 필적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자료입니다.  

 

전상자 150명 정도를 제외하면 병사자가 450명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3배 가까운 수를 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병사자 모두 수군의 귀중한 전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94년 4월 20일 ‘방비군을 결석시킨 여러 장수들을 처벌해 주기를 청하는 계본’에는 전염병으로 인한 수군의 피해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년 2월부터 전라 좌ㆍ우도와 경상우도의 사부(射夫)와 격군(格軍)들을 한 곳에 모아 한 해가 다 지나도록 파수했어도 병으로 죽은 자는 많지 않았는데, 금년 1월에는 처음으로 진중에 유행병이 크게 번져 누워서 앓는 자가 서로 이었으므로 약물을 많이 준비하여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효력을 보는 자는 매우 적고 사망자가 매우 많은 데, 그 중에 오랫동안 병들어 있는 사람은 배로 실어다가 내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1월부터 2ㆍ3ㆍ4월까지 3도의 사망자 수는 전라좌도가 606(406-전서)명이고, 현재 앓고 있는 자가 1373명, 우도의 사망자는 603명에 앓고 있는 자가 1878명, 경상우도는 사망자가 344명에 앓고 있는 사람이 222명, 충청도는 사망자가 351명에 앓고 있는 자가 286명으로 모두 3도의 사망자 수는 1304명(1704-전서)이며 앓고 있는 사람이 3759명입니다.

 

4도 합계로 감염자가 3,759명, 사망자가 1,904명으로 총 5,663명이 전염병의 피해를 입었는데, ‘임진왜란 해전사’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전체병력 18,500명 중에 무려 20%가 전염병에 걸린 상태였습니다. 수군에서도 영남바다를 꿰뚫고 있어서 충무공이 크게 의지했던 어영담이 전염병으로 사망했고 충무공 자신도 전염병에 걸려 12일이나 투병하셨습니다.

제가 인용하는 임진장초에는 여기까지만 기록되어 있지만 권율 도원수의 보고를 보면 1595년 2월의 수군 상황은 여전히 악전고투였다고 합니다.

 

주사를 조사한 성책을 상고해 보았더니, 큰 배와 작은 배가 도합 84척이고, 사군과 격군은 도합 4,109명인데 병든 자가 절반이 넘습니다. 


전염병이 일시적이지만 큰 타격을 주었다면 탈영은 작지만 반복되는 타격이었습니다. 


1594년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면 수군의 참혹한 상황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호남으로 말하자면 주사에 소속된 지방의 수군은 모두 흩어지고 없어 수령이 결복에 따라 인부를 차출하여 스스로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여 격군에 충당하고 있는데, 한 번 배에 오르기만 하면 교대할 기약도 없고 계속 지탱할 군량도 없어 굶어죽도록 내버려두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한산도에는 백골이 쌓여 보기에 참혹하다 합니다. 


원래 기피하던 천역인데다가 배를 타면 죽는다고 생각했으니 아예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달아나거나 육군으로 기피성 입대를 했고 어렵게 징집한 병력 중에서도 탈영이 빈번하다보니 충무공은 군율에 따라 처형하며 군기를 바로 잡았습니다. 


...


전란이 일어난 이후로 본영과 각 진포에 들어와서 방비해야 할 수군 중에서 도피한 자의 수는 남원이1856명ㆍ남평이 591명ㆍ옥과가 313명인데, 모두 도목장 조차 아울러 전혀 보내 주기 않아서 1년이 다 지나도록 파수하는 사부와 격군이 끝내 교체되지 못하기 때문에 공문을 보내어 재촉하느라고 사람들이 길을 매울 지경입니다(임진장초 1594년 1월).

...


명량에서도 탈영병의 변명을 일체 듣지 않고 냉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탈영병 처형에 대한 난중일기의 기록은 "임진왜란 해전사"의 자료를 인용하겠습니다. 




전사자, 아사자, 전염병과 탈영병의 4중고 속에서 충무공께서는 어떻게 병력을 충원했을까요?


가장 먼저 탈영병은 처형해서 병력누수가 없도록 막았습니다. 그리고 탈영병이 발생하는 경우, 친족이나 이웃을 대신 징발했습니다. 조정에서는 너무 잔인하다 하여 금했지만 충무공은 전라좌도 수군의 경우 도망이나 사망자가 정리되지 않은 것이 최대 80%에 이르고 현 병력 중에도 늙고 쇠약한 자가 많아 친족이라도 대신 징발해야 한다며 조정의 명령에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끝부분에 추가하도록 하죠.


그 다음으로 수군 소속의 마을과 자원을 육군과 명군의 징발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반격에 나선 육군과 명군은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어쩔 수 없이 수군 소속의 연안마을은 물론이고 수군진영에서도 군량, 무기와 병력을 징발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충무공은 권율과 심한 갈등을 빚었고 비변사는 도원수에게 우선권을 주며 충무공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후조정에서는 수군 소속 마을에서의 병력징발은 문제라고 판단하고 육군의 징발을 중지시켰고 충무공의 병력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


비록 배들이 많을지라도 격군이 없으면 장차 무엇으로 배를 운행할수 있을 것이며, 또 격군이 비록 충원되었다 하더라도 군량이 이어지지 못하면 장차 무엇으로 군사를 먹이오리까. 무릇 이 두 가지는 한가지도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온데, 군사의 징발과 군량의 조달이 모두 이렇게까지 되고 보니 다만 연해안의 백성들의 괴로움은 좀 들어가 있는 육지백성들 보다 더할 뿐아니라 당장 배를 운행하는 군사들의 군량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더욱 걱정입니다.

이렇게 가장 중요하고 또 긴급한 일을 주선하고 조치하는 것은 하루가 급하오나, 신이 영남에 있고 각 도의 순찰사도 역시 먼 곳에 있으므로 쉽게 만나 의논하지 못하고 다만 문첩만이 왕복하면서 묻고 대답하는 사이에 허술한 점이 또한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해도 이미 저물고 봄 방비가 박두했는데 일마다 뜻대로 안되어 어찌 할바를 모르겠습니다.

대개 수륙으로 적을 무찔러야 하는 것이 모두 다 급한 일인데, 근일에 와서는 의논이 분운하여 수군의 여러 방책에 있어서는 열가지 중에 한가지도 실시되는 것이 없습니다.

난리가 일어난 지 수년동안 갖가지로 계획을 세웠어도 한결같이 품은 소원은 허사로 돌아갈 형편입니다.

신과 같이 못나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은 만번 죽어도 마땅하거니와 당장 나라가 다시 살아나야만 할 이때에 있어서 전혀 어름어름 하려고만 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뒷날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사오리까, 자나 깨나 생각해 보아도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원통하고 민망함이 그지없습니다.

앞으로는 3도 수군에 소속된 연해안 각 고을과 포구의 괄장군과 군량과 군기들은 모두 이동시키지 말고 전적으로 수군에 소속시키도록 도원수와 3도 순찰사에게 아울러 다시 한번 각별히 분부해 주시기 바랍니다(1593년 11월 17일).


...


그런데, 연해안의 사부와 괄장군을 계속 징발하는 일만으로도 오히려 민망하고 걱정스러운 일인데, 좌ㆍ우도의 수사에게도 아울러 정예군사 4000명을 배정하여 징발을 독려하는 바, 수군의 사부와 격군을 남김없이 뽑아내어도 4000명의 수가 차지 못하거니와 대개 방어사나 병사는 육전의 대장으로써 언제나 육지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각각 5000명의 군사를 정비하는 것이 이치에 당연하다 하겠으나, 수군은 바다 길을 끊어 막고 있기 때문에 그 방비함이 각각 다르온데, 바다를 떠나 육지로 가게 하는 것은 실로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근간의 적세를 살펴보면 육지쪽 웅천 등지의 적이 거제로 왕래하면서 무상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바, 적들의 흉모와 비계를 예측하기 어려운 바, 수군에 소속된 정예 군사 1명은 능히 백 명의 적을 당적해내는 것이므로 도저히 뽑아내어 보낼수 없다는 사유를 들어서 우선 회답하였사오니, 조정에서도 위의 순찰사 이정암과 도원수에게 아울러 각별히 신칙해 주기를 바랍니다.

다만 수군을 징발하는 일이 이렇게 소란스러우면 신은 소관하고 있는 수졸을 통제할 길이 없을 것이며,바다의 방비에 관한 모든 일을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조처할 수 없게 되고, 수군의 군세가 나날이 크게 약해진다면 바다로 덤벼드는 적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므로 밤낮없이 근심하고 있습니다(1593년 11월 21일).

그리고 의병과 승병을 수군에 편입시켰습니다. 약 400명이 해전에 참가했다고 합니다. 




영화 명량에서도 승병이 대거 등장합니다. 다만 너무 체격이 건장한 승병이어서, 좀 아쉽기는 합니다. 


그리고 모병책임자에게도 엄중한 책임을 묻고 처벌해서 최대한 징집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원성이 들어왔고 좌의정 윤두수는 "수군 징발과정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많았다. 백성들이 잇따라 소란하고 곡성이 하늘에까지 사무쳤다"라고 충무공을 비난했을 정도입니다. 


... 


그런데, 남원 부사 조 의와 옥과 현감 안 혹과 남평 현감 박 지효 등은 전혀 이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재촉해 보낼 의사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이 전령 군관을 보내어 잘못을 추문하려고 찾아서 잡아오게 하였더니, 남원 부사 조 의는 즉시 순찰사 이 정암에게 보고하고, 옥과 현감 안 혹은 차사원이라 핑계하고, 남평 현감 박 지효는 신병이라고 거짓 핑계하면서 끝내 나타나지 않는바, 엄중한 군령이 마치 아이들 장난처럼 되어 대적을 맞이한 오늘 날 군령이 서지 않으니, 참으로 크게 놀랄 일입니다.

위의 남평과 옥과의 유위장ㆍ향소 색리 및 남원부의 도병방등은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거니와 평시에도 도피자가 10명 이상이면 그곳 수령을 파면하는 것이 사무 규율의 본의에온데, 하물며 적과 상대해 있는 때에 도피자의 수가 많은 것이 1800여명이나 되고 적다는 것이 4ㆍ500여 명을 내리지 않으니, 그들의 태만하고 소홀히 하는 죄는 당연히 처벌이 있어야 하오니, 위에 적은 세 고을 수령들의 죄상을 조정에서 각별히 처치하여 주시겠지만, 파출만은 달게 여길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런 일이 자꾸만 계속될 것이오니 군령에 의하여 처벌하면서 우선 그 직책에 눌러 두어 다시금 힘쓰게 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 밖의 광주ㆍ능성ㆍ담양ㆍ창평 등 고을의 관리들도 전란이 일어난 뒤로 방비군을 도피케 한 인원 수가 많은 것이 200여 명이나 되는데, 태만한 것이 습관이 되어 역시 방비군을 잡아서 보내지 않기로 공문을 보내어 나오도록 재촉해도 덮어 두고 시행치 않으니 위의 4고을 관리들을 아울러 추문하여 죄를 다스림으로써 그 외의 사람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다른 지방에서 전쟁을 피해 흘러들어온 피난민을 대거 징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정에서도 수군의 심각한 병력부족을 염려해서 정책지원을 해주었습니다. 1594년 8월부터 전쟁을 피하려는 피난민을 수군 연안지역으로 유도했고, 정유재란이 확실시되던 1596년 겨울부터는 지방의 육군과 공사천 모두를 수군으로 전용하였습니다. 


이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력을 보충했기 때문에 조선수군은 제 역할을 다해냈고 칠천량 전투에서 궤멸을 당하고도 명량해전에서 기적을 일으켰고 노량해전까지 전력을 보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서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연좌징집에 대한 충무공의 장계입니다. 너무 잔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온갖 역경 속에서 전쟁의 한 축을 책임져야 했던 충무공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었습니다. 

조정의 명령에 반발하며 2년 동안 불가피한 사정을 설명한 장계입니다. 



[일족에게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취소해 주기를 청하는 계본(1)]

1592년 12월 10일

 

...

흉악한 적들이 여러 도에 널리 가득 차있고 오직 이곳 호남(전라도)만이 다행히 하늘을 도우심을 힘입어 다소 보전하여 나라의 근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일을 다 이 도에서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작년 6ㆍ7월 사이에 6만의 군사와 허다한 군량을 모두 서울 등지에 끌어 갔다가 잃어버렸으며,병사가 거느렸던 4만의 군사들도 또한 입을 것과 먹을 것이 없어서 얼고 굶주렸는데, 이제 순찰사가 또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으며, 다섯 의병장이 일어나서 계속 의병을 일으켜 멀리 출전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이후로는 온 지방의 소동이 일고 공시간의 재물이 다 없어지게 되었으며, 비록 늙고 허약한 백성이 있다 해도 병기와 군량을 운반할 무렵에는 채찍질이 빈번하여 구덩이에 넘어지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

지난해 분부하신 서장 내용에, 『각 고을에서 도망한 군사들이 있어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일체 면제하라.』 하는 틀림없는 분부가 있었으므로 무릇 신하된 자로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위태롭고 어려운 날을 당하여 수졸1명이 평시의 100명에 당하는 것인데, 한번<대충 징발하지 말라>는 명령을 듣고서는 모두 다 면제될 계책을 품기 때문에 지난 달에는 10명의 유방군을 보내던 고을이 이번 달에는 겨우 3ㆍ4명을 보내고 있으며, 어제 10명이 있던 유방군이 오늘은 4ㆍ5명 미만이 남아있게 됩니다.

...

대체로 보아 변방에서 한번 실패하면 그 해독이 중앙에까지 미친다는 것은 이미 경험한 일입니다.

하물며 본도에 분산된 방위군의 수는 경상도와 같지 아니하여, 매번 방비에 임하는 군사가 큰 「진」이 많아야 320여명을 넘지 못하고 작은 「보」에는 150여명도 차지 못합니다.

그 중에서 도망하거나 죽은 지 오래된 채 정리되지 아니한 자가 10중 7ㆍ8이며, 현재 일하고 있는 자로는 태반이 늙고 쇠약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는 것을 전적으로 면제한다면 성을 지키는 군사나, 배를 움직이는 격군을 얻을 길이 막연할 것이므로 지극히 답답합니다.

...

위의 <친족에게 징발하는 일들>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전과 같이 시행하되, 조금씩 조금씩 좋고 나쁜 점을 가려내어 백성의 원성을 풀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급한 대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정에서는 다시 헤아려 생각하여 우선<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지 말라>하신 명령을 중지하여 길이 남쪽 변방을 회복하는 기초가 온전해 지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겨울 3개월 동안의 네 종류의 입대 보류는 평시에는 그대로 있다가 사변이 일어날 때 쓰이는 보충군인데,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서는 정규군도 많지 못한데다가 또 면제해 버리면 더욱 방비할 길이 없습니다.

...




1593년 4월10일


...

대개 수군은 육군에 비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1
호 4정 중에 도망친 자가 절반이 넘으므로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려면 변방을 지키러 갈 사람이 없으며, 분부대로 변방을 굳게 지키려면 백성들이 매우 쇠약하여 병들게 됩니다.

이 두 가지 중에 편의한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찌 할 수 없어서 부득이 친족에게 대충 징발하여 방어를 충실하게 하던 것은 이미 그렇게 해오던 것이므로 각 고을에도 <죽어서 자손이 끊어진 호구를 일체 징발하지 말고, 본인 및 친족과 이웃이 이것을 미씨로 삼아 숨어서 피한 자를 전례대로 도목장에 기록하여 보내라.>고 공문을 보내어 지시하였던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각 고을의 군사와 아전들도 그 이론에만 따라서 숨겨 두고서 공교롭게 기피할 꾀만 내어서<도망했다가 살아온 것을 죽었다>하니 군령이 크게 무너져 수습할 방도가 없으며, 군사의 수가 날로 줄어도 군사를 뽑아낼 수 없어 연해안의 중요한 지역이 일시에 텅 비어지고 대장이 있는 큰 진에도 장차 성문을 지킬 군졸이 없게 될 것이니, 방어의 허점이 사변을 겪은 지역보다 더 심한 편이어서 엎칠락 뒤칠락 생각하여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일은 평시에도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물며 이같이 큰 사변을 당하여 극악한 적을 제거하지 못하고 곳곳에서 서로 항전하고 있는 이때, 대부대로 도망치는 적을 무슨 힘으로 요로를 막아 죽이며, 또한 성을 지키고 구원병을 보내는 일은 무슨 힘으로 조처하겠습니까.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시기에는 급하고 천천한 것이 있으니, 굳이 불가하면 한 때의 폐단을 덜려고 하다가 길이 후회할 일을 불러온 것은 이미 지난날 경험한 일입니다.

호남 한쪽이 오늘까지 온전한 것은 전혀 수군의 대세에 힘입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회복할 시기도 또한 이 때이니 <친족이나 이웃에게 대충 징발하는 폐단을 중지하는 것>은 사변을 평정한 뒤에도 늦지 않을 것이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망령되이 진술하오니 조정에서 전후의 장계를 참작하여 「어적보민」하는 일에 양편이 다 적절하도록 처리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갖추어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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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준철 2014-07-29 21:15:27
답글

시간 날때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아무튼 이순신 장군께서 처형에 대한 자비심이 없었다는 얘기가 맞는 것 같네요...

박재현 2014-07-29 21:22:58
답글

원래. 수군. 복무는. 형벌의. 한. 형태로.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유배형이나. 곤장같은...

sutra76@naver.com 2014-07-29 21:27:03
답글

잔혹한 천상의 태제 이셨군요.... 이순신 장군....

박재현 2014-07-29 21:34:09
답글

난중일기. 읽어보면...내용의. 상당수가....탈영병을. 추적하여. 참수하고. 효수하였다...

근무. 태만으로. 곤장을. 쳤다....가...꽤. 많이. 나오죠....

일기인지... 데스 노트인지.....

박재현 2014-07-29 21:47:42
답글

그것과는. 별개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인구의. 상당수가. 피지배. 계층인. 노예제 사회인데. 탈영병입장에서. 조선이...

과연 목숨바쳐. 지킬. 가치가...있는. 국가인가... 싶습니다...

이인근 2014-07-29 22:48:58
답글

현대군에서도 탈영은 중형에 처해지지않나요? 그당시 조선의 형벌로선 당연하다고까지 여겨지네요

이웅현 2014-07-30 09:29:17
답글

당시 인권이란게 뭐 있었겠어요..충무공..무자비하게 수군을 유지하여 조선을 구하시고 그러면서 멍청이 임금에게 별 대우도 못받고 그러셨군요.그때나 지금이나 이 나라는 실질능력보다는 체면치레와 권위유지에 목숨건다는.. 본래 어디든 정부들은 다 그런다는 일반화에 또 한칼 먹겠군요..^^

예..인간이란게 본래 이치적 생물이 아니라 정치와 합리화의 생물이죠..~ 그거 극복하자고 이렇게 역사를 되짚는거고..그래서 한사코 역사 바로보기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있는거고..ㅋㅋ



아뭏든 당시 탈영하다 죽은 사람들..반면 조선을 구하고 죽은사람들..환생(전 사실 믿지않지만)했다면 전생에 나라 구한 공으로 이번생에서 미녀 미남들 만나 행복하게 살고있길..

이경식 2014-07-30 11:25:23
답글

영화명량 을 명량 만화 로 본 ㅡㅜ

이선형 2014-08-02 10:54:48
답글

조선 수군은 왜 수군보다 통제사(이순신장군) 영감을 더 무서워 했다고 합니다. 군율위반은 사형 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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